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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 | 칼럼·시평
[문화시평] 이정웅 개인전
관리자(2011-01-06 14:33:39)

이정웅 개인전 (12월 9일~22일) 갤러리 공유 

책의 변용을 통해 회화적 즐거움을 얻다 - 최정환 문학박사, 서양화가

 지방 소도시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녹녹치 않은 일이다.경제자립도는 전국 최하권을 차지하고, 변변한 기업체 하나 제대로 없는 지역적 특수성은 지역경제뿐만 아니라 미술계에도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예술은 자본을 먹고 자라는 식물이다. 르네상스 초기 메디치가문과 같은 금융재벌이 예술가를 후원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가그 화려한 르네상스를 주도할 수 있었을까? 자본과 예술은 항상 같이 해왔다.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에 있을 때는 유럽이 예술의 중심이 되어왔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세계의 자본이 집중된 결과 뉴욕은 현대미술의 메카가 되었다.전북의 경제적 · 문화적 여건으로 보아 과연 미술시장이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시장의 일원이 되지 못하는 작가들은 항상 경제적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고, 발 빠른 몇몇 작가는 영향력 있는 자본에 기꺼이 예속되기를 갈망한다.

 다행스럽게도 작년부터 전라북도에서 지역의 역량 있는 작가를 수도권에 소개한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전시지원사업이 두해 째를 맞아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예향 전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열악한문화적 여건 속에서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잘려진 책의 파편, 예술이 되다 2010년 전라북도 수도권 전시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이정웅 개인전 <영원한 생명의 시>가 서울의 인사아트센터와 전주에 있는 갤러리 공유에서 이어서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도 기존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정웅은 책을 이용해 작업하였다. 잘려진 책의 파편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고각기 다른 재질감을 가진 책과 모래 등의 재료는 하나가되어 고요하고 은근한 회화적 재미를 드러냈다.이정웅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은 여타의 작가들과 다른 재료와 작업방식에 있다는 점이다. 모더니즘 이후 수많은 작가들은 꾸준히 새로운 재료를 실험하면서 표현영역을 확장해 왔듯 이정웅에게도 재료는 새로움을 향한 욕구의 수단으로 보인다. 이정웅에게 있어서 책은 책이되 책이 아니다. 본래의 기능과 의미는 상실하고 물성만 남아 중성적오브제로 존재할 뿐이다. 

산산조각 난 지식의 파편들은 이제 꽃과 나무, 새가 되었다. 처참히 파괴된 책은 모노톤의새로운 질서를 형성하였다. 잘려진 책은 얇은 띠로 바뀌어새로운 드로잉 도구가 되었다. 이들은 공업용 본드에 의해캔버스에 고정됨으로서 드로잉이 완성된다. 부조적 성격의드로잉 사이로 모래와 종이죽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책의질감과 바닥의 종이죽, 그리고 모래의 물성은 자연스럽게 융화해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다. 태생적으로 나무와 인연을 맺고 있는 종이와 모래는 꽃과 풀이 되어 생명의 에너지를 머금은 또 다른 자연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편 컬러링이 거의되어있지 않아도 세월의 흔적에 따라 변해 버린 책의 색채는생각보다 다양하다. 마치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뭇잎이 연상된다. 세월에 의해 누렇게 변한 색감과 잘려나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책의 질감은 어떤 재료보다도 회화적이다. 한국적 문인화의 미(美)에 눈떠 작가는 10년 가까이 책을 이용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어느 날 작업실에 정리되지 않고 쌓여 있는 책에서 순간적으로 회화적 이미지를 발견하고 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한다. 

자신을 둘러 싼 가장 일상적 풍경에서 모티브를 얻어이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쌓여 있는 책들의 가로선에 영감을 받아 속도감 있는 붓의 스트로크를 이용해 책의 느낌을 해석하는 작업에서 시작해, 색면 추상을연상시키는 색면과 잘린 책들과의 병치, 그리고 문자를 통해책의 이미지를 분석하는 작업에서 나아가 완전히 잘린 책만을 이용해 화면의 전면을 덮어버리는 작업으로 발전하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이 기존의 작업과 달라진 점은 포치와 포백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포치와 포백은동양회화 특히 문인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책의 궤적이없는 부분은 문인화의 여백을 연상시킨다.이정웅은 이번 작업을 문인화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고 있다고 한다. 명나라 말기 동기창은 당시 유행하던 선종의 남종선과 북종선에서 힌트를 얻어 산수화를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누고 문인정신을 강조한 남종화의 우의를 주장하였다.

남종선은 돈오(頓悟)의 갑자기 깨우치는 방법을, 북종선은점수(漸修)의 서서히 깨우침의 방법을 추구한다. 동기창은 남종선의 돈오의 깨우치는 방법을 남종화에 대입시켜 문인들만이 이 경지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술적, 사실적화풍의 화원출신 화가들보다 내면적, 주관적화풍의 문인들의그림을 우월한 것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남종과 북종화의 격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소수의 지배층에 의해 고착화된 화론은 동양회화의 지배적 미감이 되었고 동아시아 각국은 자신들의 정서에 맞는 그림으로 발전시켜나갔다.우리의 그림 역시 우리의 풍토와 감정에 맞게 자연스럽게 변화하였다. 이정웅은 이런 한국적 문인화의 미감을 자연스럽게의식하고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치열한 삶의 각오와 이야기를 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이정웅의 작품은 몇 가지 측면에서 고무적이다. 먼저 작품의 조형적 측면에서 재료와 주제를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은 안정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하나의 재료를 가지고 오랜 시간 시도한 조형실험의 결과로 이해된다. 다른 한편으로 대중적 미감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미술인에게 미술시장을 떠나서 생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시장성과 대중의 미감만을 의식하고 작업한다면 이 또한 문제일수 있으나 다행스럽게도 작품을 지배하는 작가의 손끝은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 있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조형적 측면을 떠나 개개의 작품에 스민 작가의진지함을 간과할 수 없다. 치열함이라 해도 좋고 책임감이라해도 좋을 듯싶다. 열악한 지역의 문화적 구조 속에서 화가로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세우는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힘겨운 몸짓과삶에 대한 욕구가 작품 전체에서 발견된다. 이번 이정웅의 <영원한 생명의 시>전은 40대 중반을 넘긴 작가가 풀어놓는치열한 삶의 각오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전시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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