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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 | 칼럼·시평
꿈꾸는 노년 - 사회적 고립, 그 위험한 결말
관리자(2011-02-14 11:23:05)

꿈꾸는 노년 - 사회적 고립, 그 위험한 결말 - 황순원의「독 짓는 늙은이」- 장미영 전주대학교 교수 


황순원의 단편소설「독 짓는 늙은이」는 일제말, 1944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노년의 삶에 대한 깊은 울림과통찰을 주는 수작(秀作)이다. 황순원은 노인의시각으로 노인의 문제를 통찰했다.이 작품은‘독 짓는 늙은이’라는 제목에서 기대할 수 있는‘독 짓는 사람’의 직업관이나 장인 정신을 그린 것이 아니다. 


뜻밖에도 작가는,평생‘독 짓는’사람으로 살아 온 한 남자가노인이 되면서 겪게 되는 상실과 좌절의 심리를 깊이 천착해냄으로써 노년이 처한 현실과그로 인해 겪게 되는 불행한 경험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이런 점에서「독 짓는 늙은이」는 초역사적 휴머니티를 구현한 노년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피해자로서의 노인 문제 독 짓는 늙은이가 겪게 되는 첫 번째사건은 아내의 배반이다. 아내가 젊은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간 것이다. 송영감은아내가 조수와 눈이 맞아 어린 자식과 남편을 떠난 직후, 배우자에게 버려진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아프게 확인한다. 늙고 병든 사람의 가장 큰 심리적 고통은 누군가로부터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당하는 것이었다. 이년! 이 백번 쥑에두 쌀 년! 앓는남편두 남편이디만, 어린 자식을 놔두구 그래 도망을 가? 것두 아들놈 같은 조수놈하구서…… 그래 지금 한창나이란 말이디? 그렇다구 이년, 내가아무리 늙구 병들었기루서니 거랑질이야 할 줄 아니? 이녀언! 하는데, 옆에 누웠던 어린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였으나 송 영감은 꿈속에서자기 품에 안은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고 부르는 것으로 알며, 오냐데건 네 에미가 아니다! 하고 꼭 품에껴안는 것을, 옆에 누운 어린 아들이그냥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 잠꼬대에서 송 영감을 깨워놓았다. 


작가는 늙고 병들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극적 말로를 송 영감을 통해 직시함으로써 인간의 비정함과 함께 인간사의 허무함을 노골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황순원 소설을 연구하는 국문학자 이홍숙의 말처럼, ‘송 영감이 도망간 마누라를 찾아와 설득해서 같이 행복하게 살거나, 아니면 새마누라를 얻어서 그 전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거나좀 더 비약하여 아들 당손이를 훌륭하게 키워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거나 그도 아니면 아주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독을 빚었다거나 하는 구조의 내용을 취하지 못했기에 불쌍하고 애처로운 비극적 정서를 환기시킨다.


’이홍숙, “신화로 본 우리 소설: 황순원의「독 짓는 늙은이」”, 연민학회, 『연민학지』, 2004, 15면. 이처럼 아내의 출분사건은 노년에 대한 낙관적 전망들을무색하게 만드는 작가의 냉철한 현실인식을 보여준다.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성공적인삶을 살지 못한 노인은 주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원망과 회한의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가난과 병마를이기지 못하는 송 영감 또한 현재적 노년의 삶과 앞으로 맞이할 죽음에 대해긍정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황순원은 삶의 질을 운운하기 어려운극한의 노인을 통해 노년의 심각성을예리하게 포착해냈다. 역할 욕망의 좌절 아내의 가출에 이어 송 영감이 겪게되는 두 번째 충격적인 사건은 더 이상아이를 키울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한실상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일곱 살 난 아들을 위해송 영감은 앓는 몸을 이끌고 독을 짓는다. 그것은 아들을 돌보기 위해 생계를꾸려가려는 송 영감의 아버지로서의역할 욕망이었다.


송 영감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저녁때가 기울어서였다. 왱손이도 흙 몇 덩이를 이겨놓고 가고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바깥 저녁그늘 속에 애가 남쪽 장길을 향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거리라. 언제나처럼 장보러 간 어머니를 언제나처럼 저녁때면 조수에게 장감을 지워가지고 돌아올 줄로만 아직 아는가 보다.밖을 내다보던 송 영감은 제 힘만이아닌 어떤 힘으로 벌떡 일어나 다시 독짓기를 시작하는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겨우 한 개를 짓고는 다시 쓰러지듯이 눕고 말았다.


송 영감은 자신이 잘못 지어 놓은 독이나 조수가 지어 놓고 떠난 독까지도차마 깨지 못한다. 아내를 빼돌리기 직전에 조수가 지어 놓고 떠난 독이 유일한 생활의 방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독을 굽는 마지막 불질 때 대부분의 독이 터져버려 생계를 꾸려갈 방도가 없게 되자 송 영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만다. 아들을 남의 집에양자로 보내는 것이다.앵두나뭇집 할머니와 단둘이 되자송 영감은 눈을 감으며, 요전에 말하던자리에 아직 애를 보낼 수 있겠느냐고물었다. 앵두나뭇집 할머니는 된다고했다. 


얼마나 먼 곳이냐고 했다. 여기서 한 이삼십 리 잘 된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보낼 수 있느냐고 했다. (…중략…)그냥 감은 송 영감의 눈에서 다시썩은 물 같은, 그러나 뜨거운 새 눈물줄기가 홀러내렸다. 그러는데 어디선가 애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을 떴다. 아무도 있을리 없었다. 지어 놓은 독이라도 한 개있었으면 싶었다. 순간 뜸막 속 전체만한 공허가 송 영감의 파리한 가슴을 억눌렀다. 온몸이 오므라들고 차옴을 송 영감은 느꼈다. 이상의 장면은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노인의 삶을 크게 피폐하게 만드는요인 중의 하나가 역할 상실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송 영감은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사회적 지지는커녕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까지 포기해야 하는 절망감을 경험한다. 송 영감이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아들을 돌보려했던 눈물겨운 노력은 의지만으로버틸 수 없는 노인의 체력적·경제적한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인생에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어떤역할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은 그것이 비록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내면적인 활동이라 하더라도 인생에서 삶의 보람과 가치를 안겨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는 노인에게도예외 없이 적용되는 인간 보편의 감정임을 우리는 작중의 송 영감을 통해서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고립 노인의 특성으로 거론되는 것 중에는 집요한 고집 또는 강한 아집이 있다. 송 영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인공의 고집은 자존심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송 영감은‘불을 더 때면 가마 안의독들이 터져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을알면서도 왱손이의 권고를 무시하고만다.송 영감은 어제보다 더 쓰러져 넘어지는 도수가 많았다. 


흙 이기던 왱손이가 저래서는 도무지 한 가마 채우지 못하리라고 송 영감에게 내년에 마저 지어 첫 가마에 넣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몇 번이고 권해 보았으나 송 영감은 일어났다가는 쓰러지고, 일어났다가는쓰러지고 하면서도 독 짓기를 그만두려고 하지는 않았다. (…중략…) 곁창에서 불질하던 화부가 곁창 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분주히 이리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송 영감은 벌써 화부가 불질하던 곁창의 위치로써그것이 자기의 독이 들어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며, 화부가 뭐라기 전에먼저, 무너앉았느냐고 했다. 화부는그렇다고 하면서, 이젠 독이 좀 덜 익더라도 곁불질을 그만두고 아궁이를막아 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송 영감은 그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그냥불질을 하라고 했다.


 ‘독이 좀 덜 익더라도 불질을 중단하고 아궁이를 막아버리자’는 왱손이의 충정어린 권유는 송 영감의 고집으로 위축되고, 이로 인해 송 영감은 사회적 고립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결국 송 영감은‘거랑질과 같은 비굴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뜨거운 독가마 안으로 기어들어가 조용히 몸을일으켜 단정히, 아주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와같이 노인에게 있어 사회적 고립은 칩거 형태의 삶과 건강 악화, 자살을 초래하는 위험한 요인으로 작용한다.이상에서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황순원은 가난한 노인을 주인공으로하여 노인이 처한 현실적 여건과 함께심리적·정서적으로 악화되어가는 노인의 내면적 변화과정을 통해 노인 문제를 사회의 중요한 관심거리로 표면화시켰다.그 동안 우리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학계에서조차 노인 문제를 크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독 짓는늙은이」에 대한 관심은‘독 짓는 늙은이의 고집스런 장인 정신’에 대한 찬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독 짓는 늙은이’중‘늙은이’, 즉노인에 방점을 찍는 순간, 이 작품은노인을 통해 노인의 실상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듣는 듯한 문학적 쾌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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