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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 | 칼럼·시평 [시]
1990년 1월의 시
정양(2003-09-08 10:15:22)

뼈 빠지게 살아온 사람들은 말 그대로
뼈만 빠지고 마는 이 세상에
세상 되어가는 일 꿀컥꿀컥
다 씹어 삼키다 보면
뒤척뒤척 잠을 못 자도 새해는 오고
새해가 새 시대가 한꺼번에 와도
수십 년 묵은 겨울산천은 군사적으로
치를 떨면서 남아있다
묵은 화약 냄새는 철조망으로
기지촌으로 에이즈로 되나캐나
이 강산을 먹어대는데
그나마 써먹을 만한 것들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들 한다.
중간평가도 국민투표도 그렇게
물 건너가고, 청문회도 오공청산도
광주항쟁까지 묻어서 죄다
물 건너갔다고 한다.
소금 먹고 물먹어대는 정치꾼들이
쓸개 빠진 뻔뻔한 입을 모아서
그게 다 물 건너간 역사라고 우겨댄다.
물고문도 플랑크톤도 그렇게 물 건너가고
배를 가르고 온몸에 불을 지르고
불덩이 같은 그리움으로 이 세상에
눈 부릅뜨고 뛰어내리던 활활 타는
그리움들이
空槪念으로 失名制로 싹쓸이로
다 물 건너갔다고들 한다.
그것들이 바로 역사의 걸림돌이라고
아예 군사적으로 묻어버리자고 한다.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민주화의
걸림돌인가 지렛대인가
누가 바로 걸림돌인가 누가 번번이
생사람 잡고 오리발만 내미는가
해가 바뀔 때마다
다투어 큰소리만 쳐대는 남북문제로는
야단법석을 떨어대는 회견들 따위로는
민주의 지렛대를 흐지부지 잊어먹을
그런 역사가 결코 아니다.
잠을 안 자도 죄값을 안 치러도
죄로갈 새해가 이미 와 있듯이
물 건넜다고 우겨대는 저들 물먹은
무리들과
기지촌과 지뢰밭과 핵기지와 휴전
선들을
화약 냄새 묵은 철조망에 주렁주렁
함께 매달아
물 건너로 팽개칠 날이 오리라
두고 보아라, 뼈 빠지는 묵은 산천
들이 목을 놓아
한꺼번에 봇물 터지는 그날이
그날이 오리라

1942년 김제출생, 대한일보·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우석대학 국문과 교수.
시집 : <까마귀떼> <어느 흉년에> <수수깡을 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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