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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 | 칼럼·시평 [문화기고]
소설의 시대는 끝났는가
우한용 소설가, 전북대교수(2003-09-08 10:17:26)

나의 경우, 소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등단하기까지 20년이 걸린 셈이다. 그 동안 소설에만 매달려 산 것은 아니다. 우선 밥을 해결해야 했고,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이이들을 기르는 데도 시간을 나눠야 했다. 그러나 소설 쓰는 데 대한 관심을 포기했던 적은 별로 기억에 없다. 소설을 가르쳐야 한다는 직업상의 이유도 있지만, 소설을 쓰는 것은 곧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이란 생각은 지속적으로 해왔다.
그러나 막상 등단하고 나니 입맛 씁쓸한 소리가 들렸다. 이미 소설의 시대는 끝장이 났는데 뭘 바라고 소설에 매달리냐는 거였다. 그런 이야기는 이미 귀에 익을 만큼 들었다. '십자로에 선 소설'이라느니 '르뽀에 밀려날 소설'이라느니 혹은 영화나 비디오를 보면 편한데 누가 소설을 읽고 있겠느냐는 등, 소설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그러한 자세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까지는 소설의 운명에 대해 그렇게 느슨하게 남의 일처럼 생각해 왔던 터이지만, 막상 내가 거기 목을 걸기로 작정한 일인데 소설의 시대는 끝났다는 등, 종말을 맞게 되었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들을 때는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과연 소설의 시대는 끝났는가 하는 의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설의 시대가 끝났다고 하는 이들의 논거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인쇄매체가 역량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읽는 책'이 팔리는 게 아니라 화려한 사진이나 화보를 곁들이고 활자는 최소한으로 줄인 '보는 책'이 팔린다는 것이다. 성경이나 역사책이 만화로 제작되고 황석영의 <장길산>같은 대하소설이 만화로 만들어져 팔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요즈음 사람들은 도무지 진지하게 책을 읽으려 들지 않는다는 푸념을 가끔 듣게 된다. 그러니까 출판사에서도 읽는 책보다는 보는 책으로 편집을 해보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이 잘 안 읽히는 데는 전파매체-특히 영상매체-의 발달을 그 원인으로 든다. 전자산업의 발달은 현대과학이 이룩해낸 경이적인 업적이다. 전자산업의 발달로 우리는 시간 체험의 방식이 달라졌고, 음향에 대한 감각에 혁명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색채에 대한 감수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는 안방에 앉아서 백두산의 위용이나 금강산의 수려한 경관을 언어를 통하지 않고 직접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전자매체의 그러한 역량아, 대단한 끈기를 가지고 읽어내야 하는 소설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한 시간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될 내용을 어렵게 소설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설 종말론 자들의 주장이다.
소설을 대신할 만한 장르, 예컨대는 르뽀 양식이 소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 소설 종말론 자들의 한 논거로 인용되곤 한다. 이는 이미 사르트르 같은 이들이 지적한 바 있다. 현대에는 소설보다는 르뽀나 자서전 같은 종류의 보고문학이 서사문학을 대신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근년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현상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제 5공화국 시대의 각종 사건을 추적한 르뽀기사가 월간지에 특집으로 다루어지고 경영인들이나 정치가 혹은 군인들의 자서전이 종이 값을 올리는가 하면 <세계는 넓고…>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의 기록이기 때문에, 따라서 진실인 것으로 믿어지는 그러한 글은 허구적인 상상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들의 욕구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의 모범이 될 만한 작품들이 안 나오고, 서정장르가 대단한 역량을 발휘하는 점으로 보아도 소설은 종말을 맞게 된 게 아니냐는 그러한 주장도 있다. 소설의 변모는 실로 눈부신 바 있다. 그리고 근년에는 이해인, 도종환, 서정윤 등의 서정시집이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오래 유지했고, 김지하의 <大說 南>이라든지 고은의 <萬人譜>등에서는 서사적인 내용을 서정적인 언어로 읊은 특이한 장르가 나타나 장르의 변이를 보여주었다. 이러한데서 소설 장르의 종말을 예언하는 근거를 찾으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사항으로 소설 종말론을 증거 하기는 어렵다. 소설의 종말을 논하는 것은 기왕에 있었던 일을 검토 고구하는 과학이 아니라 일종의 예언이기 때문이다. 예언이 현실을 반성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문학적인 방향의 예언은 단지 예언에 그치고 말기 쉽다. 문학은 법칙을 따라 전개되는 측면보다는 문학을 둘러싼 사회, 경제, 문화적인 여건에서 받은 충격을 수용하면서 돌연변이적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 소설이 종말을 맞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검토 해 보기로 한다.
우선 근대소설을 인쇄술의 발달을 배경으로 하여 성장한 문학양식이다. 대중적인 독자들의 수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책의 다량 보급이 가능해져야 한다. 발자크의 소설에는 인쇄업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속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것은 인쇄업이 소설의 발달과 얼마나 밀착된 것인가를 증명 해 준다. 소설이 책의 형태로 보급된 다는 것, 그리고 독자들은 '소설책'을 읽는데, 소설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하는 점을 따져보아야 한다.
아무리 '보는 책'이 잘 팔려나간다고 하더라고, 읽는 것을 제쳐두고 그저 훑어보는 데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설이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이고 일상적인 생활의 영역에서 이야기거리를 얻어낸다고 하더라고 소설을 읽으면서 배경의 묘사나 인물의 묘사 같은 데에 빠져 그 소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읽는다는 것은 소설 소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러한 작업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의미형성의 기본욕구이다. 소설이 책의 형태로 보급되고 유통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 작용의 기본욕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의미추구의 욕구가 살아있는 한 소설의 종말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역사성과 철학성의 측면이 소설 속에 살아 있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등의 발달과 보급이 소설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논지 또한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한 영상매체가 보다 생생한 장면과 색채를 우리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며, 문자언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을 커버해 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체를 운용하여 서사를 전달하는 데는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떤 대리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배우가 이야기를 대신 실현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미지의 확대를 가져오는 동시에 활자매체를 통해 우리들이 읽어낼 수 있는 역영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인물의 계층이라든지 사회풍속 등의 거대한 구조와 디테일을 동시에 제시하고자 하는 이른바 전면적 진실을 추구한다. 그러나 영상매체의 경우 전면적인 진실을 추구한다는 환상을 제공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인적 자원의 한계, 기술상의 제약 등으로 인하여 전면적인 진실을 추구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한 포기 풀이나 희귀한 생물, 혹은 그로테스크한 연상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영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시청자의 능동적인 참여가 차단되는 것이 영상매체의 특성이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글을 읽는 가운데 그 글 속에서, 글이 완성되도록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과정을 뜻한다. 거기 비해 영화나 텔레비전 등은 스크린과 브라운관으로 인해 화면과 감상자의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영화를 보다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간다든지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소설은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읽어 주어야 작품이 완성된다. 작품에 주체적으로 참여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소설의 힘은 다른 매체에서 구하기 힘든 특징이다. 작품이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요구해 오는 한 소설의 운명이 끝장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기구한 운명을 살아간 이들의 수기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는 경우가 있다. 또한 소설을 읽으면서 밤을 꼬박 밝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문학현상의 통합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학)소설)의 감동은 사실에서 오는 감동과 허구가 부여하는 감동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르뽀를 읽는 데에 익숙해진 독서법이 모든 독서법을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우리들이 사는 시대가 가파르면 가파를수록 우리는 느긋한 안정감을 향유하지 못한다. 핫뉴스가 쏟아져 나오는데 느긋하게 소설을 읽을 수 없게 몰아가기 때문이다.
전북일보에 <그리운 靑山>을 연재하기 전이었다. 원자력발전소의 문제를 소재로 <불바람>을 쓴 직후였다. <말>지에서 원자력발전소의 문제점을 르뽀형식으로 써 달라는 부탁이 왔다. 현지를 답사하고 원고를 서 주면서, 환경과 공해 문제를 소설로 쓸 생각인데 지면을 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가 되었다. 4천 장 정도의 길이가 되는 장편을 구상하여 첫 회 분을 써 보냈다. 편집회의 결과는 그런 느슨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매체가 못 된다는 것이었고 미안하다는 사과의 편지와 함께 원고가 되돌아왔다. 매체의 특성으로 보아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구적인 상상력보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감동에 더욱 치중하는 시대라고 파악하는 편집자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허구적인 상상력의 감동을 적당히 수용할 줄 아는 그러한 수용구조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문학에 대한 취향은 시대상황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시대의 벼랑이 좀 낮아지면서 르뽀에서 소설로 관심이 다시 돌아올 것이 틀림없다.
소설의 근본적인 양상은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실상을 파악하고,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상을 그리기도 한다. 이야기에 대한 근원적인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소설은 끝까지 자신의 장르를 지속해 갈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사실 차원에만 우리의 삶을 비끌어맬 수 없다. 사실의 가치와 의미를 따지는 데는 허구적인 참조의 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허구적인 상상력이라 한다. 소설에 허구적인 상상력이 살아 있어 감동을 불러오는 동안은 소설의 종말을 운운하는 것은 조급함에 속한다고 봐야 옳다.
출판계에서는 어떤 작가의 창작집을 내줄 때는 장편을 써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 있다. 생활이 바빠지고 복잡해지면서 단숨에 읽어낼 수 있는 단편이 선호된다는 식으로 배운 문학상식이 퇴색되었다. 요즈음은 단편소설보다는 장편소설이 더 잘 팔린다는 것이다. 단편의 치밀한 구성이나 일관된 문체보다는 장편소설의 웅혼한 구상과 도도히 흐르는 사회 역사적인 현상에 보다 관심을 갖는다. 이는 장르 자체의 변화와 함께 독자들의 소설 수용구조가 달라졌음을 뜻한다. 이러한 수용구조의 변화를 따라 소설도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할 것이다. 끝장이 아니라 열린 종말이 보장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격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는 문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주제의 강렬성을 내세워 기법이 홀시되는가 하면 순수를 표방하는 가운데 문학의 사회 역사적인 연관을 기피하기도 한다. 그리고 당신은 참여 작가냐 순수작가냐 하는 웃지 못 할 질문을 서슴없이 해대기도 한다. 어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안 읽어보았지만'하는 전제를 달기도 한다. 작품을 읽지 않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하묘지에서 미이라를 주무르는 屍姦과 다를 바가 없다. '文學的 文化'를 올바르게 이루어내는 작업은 곧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오늘 우리들 삶의 조건을 점검하고 내일을 향한 모색을 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대화문화를 이루어내는 작업에 연결된다. 소설을 이루는 언어 자체가 대화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은 물론 우리들이 소설을 읽는 것은 물론 우리들이 소설을 읽는 것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는 크게 의식의 민주화에 연결된다. 또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더불어 사는 윤리의 점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을 문하그이 형식으로 담아내는 것이 소설이라면, 우리가 그러한 지향을 갖고 있는 한 소설은 지속적으로 쓰여지고 읽힐 것이며, 소설가들이 밥굶고 들어앉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가들이 소설을 잘만 쓴다면 고액납세자의 명단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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