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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 | 칼럼·시평 [문화저널]
향토작가가 쓰는 향토장편뻔데기
이병천 소설가(2003-09-08 10:57:10)

이제 내 고향에 얘기를 좀 해야겠다.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자랑스러운 그 고향의 그 얘기들.
사실 나는, 지금 하려고 하는 이 얘기가 정말 있었던, 그래서 내가 직접 목격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충격이었던 터라 끊임없이 회의해 왔다. 그 일이 대체 사실이었을까? 내가 소설을 쓰다 쓰다 아제는 정말이지 소설 따위를 만드는 게 아닐까? 여태 말하지 못하고 쓰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러다가 현장 노동운동에 투신했다던 후배 하나가 나를 찾아와 만난 일이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흔히 그렇듯, 얼굴의 살갗은 푸석푸석하고 입술의 껍질이 말라 벗겨지던 후배의 모습은 우선 보기에 안쓰러웠다. 말을 하지는 않아도 끝없이 나를 질타하는 듯한 눈빛에 괜히 죄스럽기도 하던 날이었다.
"술 한 잔 헐래!"
"요즘은 못허는디요. 형! 나 술 한잔 사줄 수 있으면 대신 쪼깨만 도와주시오."
"또, 머어슬 마!"
"졸지에 한 이삼십 명 아이들의 애비 노릇을 하게 됐어요. 공단지역에다가 탁아소를 채렸거든요."
"뭐, 탁아소? 남쪽에도 그런 게 있냐?"
"우리가 맹글었죠. 뭐! 먹고살라고 부모가 아침부터 함께 일 나가는 사람들을 봤어요. 그런디 애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는 아시요?"
"……"
"돈 있는 사람들이나 유아원이니 유치원에 보내죠. 대부분은 그냥 집에다 냉겨두고 일을 나가요. 빵이나 한 두어 조각 앵겨놓으면 훌륭하죠. 그러다 애들이 나중에 배고프면 흙도 파먹고…… 심지어는 방에다 아예 가둬두기도 하는데, 그런 일이 형은 상상이나 돼요?"
그렇게 말하던 후배 녀석은 눈물까지 글썽이던 것이었는데 나는 거역하지 못하고 이른바 그 후원회원으로 등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배의 글썽거리던 눈물 때문에 선뜻 돈을 내놓지만은 않았다. 녀석은 내게 당돌하게도 그런 일들이 상상이나 되느냐고 물었지만 내 기억의 저편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어둡고 살벌한 추억은 단 한 시도 내게서 떠나지 않던 터였다.
달라들어 부쳐 먹고 살만한 농토가 비교적 적었던 내 고향 마을에서는 고양이 코빼기만 한 땅의 농사일이 끝나면 재빨리 다른 평야지역에 일을 하러 떠나곤 했다. 어디 개화도며 김제평야 아니면 옥구평야의 대야 임피 등까지, 일이 있고 일손을 필요로 하고 임금을 주는 곳이면 어디든지 상관없었다. 그 때는 대부분 농번기 방학 때여서 나도 따라나서곤 했다. 한가한 소풍길이 아니라 잘만 하면 나도 반몫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이었는데 키는 작아도 부지런히 일했으므로 나는 그럭저럭 반몫취급을 받곤 하였다. 도시락을 싸들고 가던 긴 모내기의 행렬과 끝없이 넓은 들녘,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반몫으로 셈해 달라고 부탁하며 내 키를 추켜세우던 안타까운 모습들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자부하곤 한다. 비록 돈을 벌기 위한 방책이긴 했지만 내 향토의 대표적인 농토들마다 찾아가 나는 씨를 뿌려본적이 있으면 모내기를 했으며 추수를 했노라고, 이빨을 악물고…….
우리들의 이런 심심찮은 돈벌이는 마을마다 인근마다 금새 알려지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급기야는 웬만한 이웃들이 이 행렬에 식구들을 거느리고 함께 따라나서기 시작하였다. 새벽 네 시쯤이면 어김없이 마을을 빠져나와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다시 어디론가 끝없이 걸어가던 그 빛나는 추억 속에는 고통도 쓸쓸한 부끄러움도 내게는 함께 뒤섞여 있다.
그런데 어찌됐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남녀노소가 함께 떠나는 마당이었으므로 문제는 언제나 어린아이들이었다. 젖먹이까지야 맡기지 못하면 떼어놓을 수도 없었지만 그 이상의 아이들까지 세세해 배려할 여유는 어느 집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 긴긴 날 동안 어느 뉘 집 애라서 흙을 집어먹지 않을 수 있었으며 제 똥을 맛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러는 잠겨진 방안에 갇혀 너덜너덜해진 벽지나 문풍지도 뜯어먹으면서 그 애들 나이로는 이해 못할 외로움으로 오던 배고픔, 그것을 달래기도 해야 했음을 나는 안다. 가둬지지 않은 아이들 더러는 텅텅 빈 마을의 고샅길들을 오가며 강아지와 닭과 거위와 어울리기도 하면서 그들과 먹이를 다투기도 해야 했으리라.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곰곰 생각해 보니 그 사건이 내 안에서도 전혀 황당무계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 그 일은 바로 우리 옆마을에서 그렇게 비롯되었다.
세 살과 다섯 살 두 형제의 아버지는 그 애들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궁리하다가 돼지우리를 떠올렸다. 우리 위의 한쪽에는 시렁을 얹어 짚더미를 쌓아놓았는데 짚더미를 조금만 덜어내면 아이들이 놀며 지내기에도 그만일 성 싶었다. 그 아버지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는 일을 나오기 전에 아이들이 좋아하던 번데기 한 봉지를 그 짚더미 위에 헤쳐 뿌려놓았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짚더미를 한번씩 들출 때마다 번데기가 하나씩 찾아지는 일은 재미도 있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를 만 했다. 어딘가에는 분명 아직 발견해내지 못한 번데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처음에는 짚더미를 한 단씩 들추어보다가 그것을 풀어 헤쳐 한 주먹씩 들춰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예 지푸라기 하나씩을 제쳐가며 번데기를 찾곤 했을 것이다. 내가 잘못 봤으니까 그렇지, 어딘가에 번데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번데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 다른 곳에 흘린 것은 아닐까, 그 중 큰 아이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번데기 한 마리라도 더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그 애는 결국 끈기의 보람으로 그것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돼지우리 안에, 돼지가 밟아놓은 발자국 위에 동그마니, 운명처럼 놓여 있었다.
아이는 주저하지 않았다. 꽥꽥거리던 돼지는 언젠가부터 한쪽 구석에 누워 아무런 소리도 없다. 농번기의 긴긴 여름날 동안, 너구나 빈집에서, 돼지에게까지 때맞춰 구정물이라도 한 바가지 퍼주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돼지도 배가 고팠을 것이다. 자기 배채움에 관한 한 돼지는 그 얼마나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던가. 그러나 지금은 배고픔에 대한 하소연의 울부짖음이 아무런 쓸데없음을 아는 것인지 잠잠하다. 이따금 고살길을 스치고 가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나 바람에 실려 오는 먼 곳의 희미한 음식 냄새에 한번씩 몸을 뒤척일 뿐…….
아이는 살금살금 돼지우리로 내려섰다. 자기가 봐둔 번데기에서 눈을 조금도 떼지 않은 채 다섯 살의 아이는 무사히 돼지우리 안으로 들어섰다. 하기야 위에서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다칠만한 높이는 물론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애는 아주 큰 밥사발을 대하듯 입안에 단침이 고인 채 곡 정말 밥사발만 하게 보이던 번데기를 향하여 손을 뻗쳤다. 바로 그때였다. 잠자던 돼지가, 돼지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을 기아와 좌절의 발악으로 거슬러 올라 잊고 있었던 야성을 되찾고, 아이에게 돌진한 것은….
나는 더 이상 이 얘기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어디 대야 벌이었는지 임피땅이었는지, 아니면 징게맹경의 들녘이었는지, 나는 그날 모내기 실력을 인정받아 최초로 반몫을 정당하게 받아 냈던 것이다. 죽은 아이를 들춰 없고 아이의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 또 그 애의 어머니는 어떻게 했는지, 이상스럽게도 아무런 기억이 없다. 그렇다. 이제라도 나는 여쭤볼 것이다. 젊어서부터 이미 침침해진 눈으로 내 어머니는 내 옷이나 양말의 헤지고 구멍 난 부분을 꿰매주시곤 했다. 이제 어머니는 내 추억 속 그렇게 헤지고 너덜너덜해지고 구멍 난 부분을 꿰매주실 것이다. 완주땅 용진이, 내 고향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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