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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 | 칼럼·시평 [서평]
녹두장군
정철성 영문학, 전북대 대학원(2003-09-08 11:07:19)

갑오농민전쟁 백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백주년의 감회가 더욱 새로운 것은 갑오년의 전쟁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전쟁의 기록은 승리자에 의해 남겨지는 것이 상례이지만, 그 승리자가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경우에는 왜곡되어 남겨지기 마련이다.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변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전쟁이 한때 동학란으로 불리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 후 동학농민운동 또는 동학혁명 등으로 지칭되기도 했지만 명칭의 변화에 값하는 진실한 평가가 실제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선뜻 수긍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이러한 때에 갑오농민전쟁의 의리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살펴보는 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작업일 것이다.
작가 송기숙은 이전에도 <암태도>와 같은 작품에서 역사적 사건을 소설화하는 능력을 보였었다. 물론 <녹두장군>은 <암태도>에 묘사된 소작쟁의와는 비교 자체가 우스꽝스러우리 만큼 규모나 영향력이 엄청나게 큰 전쟁을 다루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녹두장군>은 삼부로 집필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나온 제1부 상,하권은 전체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뒷표지에 실린 '작가의 말'에 의하면 작가는 갑오년의 전쟁을 동학농민전쟁으로 부르고 있으며, 동학농민전쟁이 "그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어온 민중항쟁의 위대한 첫출발이었다"고 믿고 있다. 동학농민전쟁의 목표가 "반제국주의 반봉건 투쟁이었으므로 그 전쟁은 지금까지 100년 가까이를 내리 계속 되어오고 있는 셈이다"라는 말에서도 작가의 튼튼한 역사의식을 느낄 수 있다.
반제·반봉건의 깃발을 내걸고 동학농민군이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작가는 당대 농민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밝히고 있다. 관속배들의 탐학과 왜놈들의 취리에 시달리는 농민의 모습은 1부 상권의 전개에 중요한 살변 즉,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살변을 기화로 한몫 챙기려는 군아의 관속배들은 애매한 사람들을 잡아다 가두고 매로 치며, 잡혀온 사람들의 목숨을 보전키 위해 가족들은 배타고 건너온 쌀돈이라도 얻어다바치게 되고, 그 돈은 다시 선변까지 떼는 고리대로 변하여 저자거리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돈이 돌고 돌지 않으면 어떻게 없는 놈들이 계속 가져다 바칠 수 있겠는가? 이야말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돌아가는 유통구조인 셈이다. 결국 관속배들의 주머니에는 돈이 쌓이고, 왜놈들의 뱃속으로는 쌀이 들어가고, 농민의 어깨에는 빚더미가 얹히게 된다. 관속배들이 언덕거리고 삼기에 살변은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이지만 이런 강력사건이 아니더라도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뜯어낼 구실이 있었다. 불효니 상피니 하는 죄목들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씨조선건국의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덕목이 사람을 잡는 올가미로 변해버린 상황을 목격할 수 있다.
<녹두장군> 1부에는 이씨조선의 옹호자 또는 '나랏님'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인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지배층에 속하는 자들은 모두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하다못해 요즘식의 표현으로 양심적인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비 나부랭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중 이런 유형에 근접해 있다고 보이는 인물이라면 박문장의 아버지 해봉 정도일텐데 동학의 논리에 대한 그의 항변은 고작해야 "세상이 이렇게 썩어버렸으니 성현의 가르침도 이 한촌궁유의 몰골처럼 힘이 없구나"라는 푸념 섞인 맥살없는 웃음으로 끝나고 만다.
동학도인 즉, 교도들이 바로 농민이었고, 농민이 동학을 받아들였던 까닭에 양자는 서로 구분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차이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1부에서 동학의 종교의식이 직접 묘사되거나 교리가 장황하게 설명되는 장면은 없지만 인내천과 후천개벽이 언급되는 곳은 여러 군데이다. 공부 금영에 올린 소나 전주 완영에 낸 '각도동학유생호송단자'에서도 동학 특유의 종교적 색채를 느낄 수 있다. 이에 비하여 농민은 여전히 무의식적인 삶의 욕구에 따르는 피동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상권의 동네회의에서 두레를 운영하는 솜씨를 보면 다소 말이 많은 듯해도 무리 없이 결말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렇지만 결국 나졸 치상에 액막이 삼아 민부전을 각출하는 방법의 토의에 그치고 말아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회피에 머무르는 꼴이다. 동학도들의 처지도 아직은 교조신원의 호소에 그치고 있다. 삼례대집회의 성과를 동학도 자신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한 가운데 1부가 끝난다. 이들 동학도와 농민이 어떻게 힘을 모아갈 것인가는 물론 2부와 3부를 기다려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서장옥이 전봉준을 만나 한말- 호랑이나 토끼는 종자가 달라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은 하늘의 섭리요. 허지만, 권귀나 상민이나 똑같은 사람은 종자고, 다같이 하늘이오. 하늘을 먹는 하늘은 없소. 이것이 천리를 거역하는 짓이오-에서 햇수로 이년 뒤 폭발하게 되는 힘의 응축을 감지할 수는 있다.
완결되지 않은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는 미완성으로 끝난 경우가 아니라면 작품이 완결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쪼가리'서평을 쓰는 이유라면-결국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만-백주년이 다가온다는 시기 탓도 있지만 눈에 익어 밭에 익은 전라도의 산천에 묻혀있는 이야기들을 다시 생각해 볼 시회를 <녹두장군>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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