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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5 | 칼럼·시평 [문화시평]
회상적 체험에 의한 동질성 창출
'만민보'
김길수 순천대 교수(2003-09-08 17:43:02)

혼돈과 무질서가 우리의 주변을 가득 채워만 간다. 논 팔아 상경한 시골사람들의 생존 의욕은 전세, 월세의 폭등으로 점차 파괴된다. 전세값의 폭등을 감당 못해 비관 자살한 노동자의 수효는 늘어만 간다. 정직하게 저축하고 진실 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생존 경쟁에서 밀려 날 뿐이다. 올바른 시각에 의거한 순수한 행위는 갈수록 푸대접을 받는다. 비정상을 향해 치닫는 이 현실, 위기의 끝이자 벼랑의 막바지를 느끼게 하는 이 세계가 어서 빨리 개선되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소리가드 높다. 심각한 현실이 계속되는데 현실과 무관한 공연은 지속되거나 사랑 받을 리 만무하다. 전주시립극단의 〈만인보〉(고은詩, 시립극단 공동 구성, 고금석 演出) 공연은 사회 변혁을 향한 연극적 의지를 새롭게 실현시켜 놓고 있다.
만인보(萬人講)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누구나 틀고 알고 있으며 이미 체험했던 지난 이야기이다. 유년기 마을사람들의 삶과 죽음, 사랑과 싸움, 건강함과 우매함, 슬픔과 고통이 다양하게 배여 있다. 먹을 것이 없어 마을 사람들은 갯가에 나가 나문재 나물을 묻어야 한다. 꽃을 매개로 사랑을 표시하는 동네 처녀들의 소박함이 있다. 어린애의 엿을 형이 먹기 위해 심통을 부리는 천덕꾸러기 천봉영감이 있다. 씨름판의 호쾌함과 건강함은 간통한 남정네를 추방하는 정직함으로 변용된다. 먹을 것이 없어 모종이나 씨앗마저 봄이 먹어 버리는 할머니의 우매함은 정신대로 딸이 팔려가는 줄도 모르고 좋아라 하는 시골아낙의 우둔함으로 이어진다. 죽은 할머니의 관 위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엉뚱한 모습은 끈적끈적한 인간애의 싹을 느끼게 한다. 죽음을 치러 주기 위한 동네 사람들의 공동체의식은 노래판과 놀이마당의 신명으로 변용되기도 한다. 이 같은 이야기가 무대화 되고 관객은 토속적인 사투리와 풍습의 구수함을 맛본다.
이 같은 소재는 관객 모두에게 향토적 끈끈함과 지역 공동체의 아기자기함을 맛보게 한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우둔함으로 인해 슬픔과 괴로움을 겪은 사람이라면 동질적 아픔 속에 젖어 있을 수 있다.
마을 공동체의 다양한 삶과 그 파노라마가 배우들의 토속적 몸짓 언어와 음색에 의해 창출된다. 관객은 유년기 시절의 회 ·노·애 ·락과 그 끈끈한 질곡의 다발을 체험하고 무대 행위에 몰입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공연의 강점은 이 같은 몰입 연극내지 상투적인 신바람 연극의 껍질을 한 1차원 깨뜨렸다는 데에 있다. 관객은 4통속적 몰입을 거부당한다. 여러 사건들 사이엔 그 어떤 인과성마저 찾기 힘들다. 이러한 틈 사이에 오히려 역사적 사건이나 세상적 에피소드가 첨가된다. 몰가치 투성이로 가득 찬 에피소드들이 막간 풍자극을 구성한다. 신문고의 설치를 통해 세상의 민주화가 실현되었음을 왕은 강변한다. 급기야 왕은 상소마저 묵살하고 그 상소문으로 구겨 만든 골프공을 관객을 향해 조롱 섞인 몸짓으로 내팽개쳐 버리기에 이른다. 왕의 불합리성이 현실적 소재로 변용되고 고발되며 풍자된다. 단순히 즐기고 감상하려는 묵시적 관극자세는 일시에 파괴된다. 방관적 입장에서 무대위의 사건을 즐기려는 고정된 의식 역시 일시에 무너진다. 막간극은 또 다른 풍자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술과 여자에 빠진 왕에게 충신이 진언을 하지만 충신은 잔인하게 팔 다리가 잘리고 고문을 당한 채 살해된다. 고문이나 살해의 장면은 잔혹극적 요소로 변형 되면서 관객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그러나 관객의 상투적 반감 의식은 여지없이 깨뜨려 진다.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산 자와 공놀이 유희를 즐긴다. 죽은者에 대한 관객의 연민은 마치 사기당한 감정으로 변용되고 급기야 이질감의 축적에 의해 냉철한 비판 의식으로 격상된다. 또 다른 막간극에선 관객은 이제 극중 인물의 파트너가 되기도 한다. 소금장수이야기나 탈춤여인의 언어는 무대 위의 사건이 관객이 처한 심각한 현실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부분에서 창출된다.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은 우리 모두의 우매함과 우직스러움을 일깨워 준다. 마올 사람들은 연합군을 환영하기 위해 만국기를 흔들며 웃는다. 그들은 일제의 사슬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준 사람들이 미군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 비행기의 폭음이 무대와 객석을 시끄럽게 관통한다. 뒤이어 단말마적인 소년의 외침이 들린다. "미군이 닭 잡아먹었다!" 소년의 외침 소리와 비행기의 굉음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만국기 행렬은 계속될 뿐이다. 앞으로의 암담한 미래를 예견하지도 못한 채 그들은 마냥 서 있다.
배고픔과 어리석음, 순수함과 진솔함의 모티브가 이 공연 전체에 배여 있다. 황폐한 곳에 내팽개쳐진 민중의 모습은 공연이 끝났음에도 무대 밖 현실에서 계속 된다. 바로 이 점이 냉정한 관극을 통해 인식된다. 연극이 세계를 단순히 모방한다는 진부한 개념은 이 공연에 적용될 수 없다. 세계자체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이 공연을 본 관객 모두에게 싹틀 수 있다. 이를 위해 줄거리는 파괴 되어있다. 형식 역시 파면 다발의 연속 그자체이다. 갈등에 의한 흡인력 역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한 소재에 몰입하려는 관객의 재래적 감상 성향은 철저히 부정된다. 관객이 보는 앞에서 배우들은 다음 장면의 소품을 배열한다. 개소리 내지 기타 음향 역시 스텝진의 목소리에 의해 창출된다. 무대사건에 대한 관객의 거리감은 자주야기 되어진다. 이로 인해 이 공연의 주요 소재들은 단순한 추억거리나 감상적 과거 사건들로 머무를 수 없다. 다시 말해 회상 작용에 의한 몽상적자기 침잠이나 감각적 도취 따위는 철저히 거부될 뿐이다. 그렇다고 감정몰입이 완전히 금지된 것만은 아니다. 이럴 경우 관객은 너, 나 구별 없이 끈끈한 내적 체험의 연장선상에서 공동체적 동질성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이 체험의 다발들은 자주 끊기고 중단된다. 이질적 요소들이 자주 삽입됨에 따라 객관적 인식을 겨냥한 긴장 상태는 자주 발생된다. 이로써 긴장과 이완의 순환은 계속 일어나게 된다. 이 같은 공연 미학적 인식 행위나 수용 행위가 관객 모두에게 유발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경우에 따라선 혼돈의 현실 세계와 무대 세계를 연관짓지 못하는 관객들도 있다. 환상 파괴를 겨냥한 이 같은 연극술은 소시민적 무기력과 방향상실을 일깨우고 자성하기 위한 고도의 술수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 공연은 전위적이다. 줄거리를 따라잡으려는 감상태도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도이 공연은 가히 실험적 면모를 지닌다. 아울러 파편 다발의 체험들이 고향회귀의 자의식에 의해 한 덩어리가 됨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같은 총체적 체험들이 전라도 밖의 지역에서도 과연 긴밀한 내적 관계의 끈으로 연결될 것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만약 동질성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지역의 감상층들이 있다면 그들로부터 자칫 주관적 소재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이 공연은 받을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다양한 체험과 그 회상의 다발들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상상력에 의해서만 한 덩어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회상체험에 의한 동질성 창출이 불가능하다면 낯설게 하기 위한 환상파괴, 장치 역시 무의미한 짓거리로 간주된다. 감상층 거의 모두가 향토와 자연으로 되돌아가려는 본능을 물씬 풍겨주는 전라도 관객이었기에 이 공연은 호소력을 발휘했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발생한 심미적 인식 행위는 우리의 실존을 격상시켜주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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