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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5 | 칼럼·시평 [서평]
『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정철성 전북대 대학원 영문학(2003-09-08 17:45:50)

소설『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는 우리가 제목을 보자마자 감을 잡을 수 있듯이 성장 소설류의 작품이다. 본문에도 '통과의식' 또는 '다시 태어나는 일' 등의 표현이 눈에 띈다.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성장소설의 주제는 주인공이 다양한 경험과 정신적인 위기를 겪으면서 어린이로부터 성숙한 어른, 다시 말해서 자기정체성과 세계 속에서의 역할의 인지로 나아가는 정신과 성격의 성장이다.
이 소설을 감미로운 좌절의 기록으로 오해한다면 제목을 '더 이상/아름다운/방황은 없다' 로 띄어 읽었기 때문이다. 책표지의 도안도 이런 식인데다가 제목을 3/4/5음절로 나누면 박자까지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하나인 민수가 현장으로 떠나면서 보낸 편지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러나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의 방황은 이해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아름답지 않다고. 이 어두운 죽음의 시대에 결코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고.

그러므로 제목을 '더 이상/아름다운방황은/없다' 로 원고 의미도 '이제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이 주인공이 세계의 뒤얽힘에 눈뜨고 새로운 결의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성장소설의 기본적인 틀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색다른 감동을 주는 것이 이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역사에 눈을 떠가는 집단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은 78학번부터83학번까지의 대학생이다. 과거의 무게에 눌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지섭, 스스로 세계관을 세워 나아가는 민수, 운동을 버리고 떠나는 인경, 현실과 타협하는 덕현, 야학의 강학 동윤, 녹화대상이 된 형근, 밧줄시위를 하는 호신, 대학신문사의 찬식, 현장에 간 미혜, 야학의 병찬……. 이들의 고통과 좌절과 일어섬이 줄거리의 중심이다. 이들의 곁에 등불야학의 학강들인 명자, 연순 등이 있다. 여기에 지섭과 민수의 가족들을 덧붙이면 등장인물대부분의 목록이 완성된다.
1983년의 여름을 살았던 그들의 삶을 구속하는 과거의 사건은 광주항쟁이다. 소설에 끊임없이 삽입되는 과거에 대한 회상의 출발점은 광주다. 과거의 무게는 그것을 부수려는 주인공들에게 체포, 구타, 감금 그리고 죽음으로 보답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오는 죽음의 장면은 비장한 울림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진규와 형근의 경우에는 그들의 마지막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다하더라도 호신의 죽음을 어처구니없이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 묘사한 것은 호신이 민수의 꿈에 나타나 씨앗을 전해줄 정도의 인물이었기에 더욱더 아쉬움으로 남는다. 더욱이 "혜섭은 잠자듯 죽었다." 혜섭의 죽음은 터질 듯한 분노가 아니라 애잔한 서글픔을 준다.
내친 김에 몇 가지 눈에 띄는 문제점을 지적해 보자. 첫째, 동윤의 성이 바뀐다. 형근을 문초하던 자는 서동윤이라고 했는데 연순이 말할 때는 신씨가 되었다가 다시 민수가 애기할 때 서씨가 된다. 연순이 두 번씩이나 신동윤이라고 말하는 것이 식자공의 실수인지 작가의 깜박수인지 모를 일이다. 둘째, 지섭의 아버지가 해직된 이유가 분명치 않다. 진규의 죽음과 혜섭의 발광에 아버지의 해직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지섭의 가정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데 소설의 본문에는 아버지의 해직과 진규의 행적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아직은 사위 후보였던 진규의 행위가 문제되어 아버지가 해직되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섭의 가정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엎친 데 덮친다는 식의 우연인가? 셋째, 지섭의 성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군대가기 전의 새학기에 한 열흘쯤 신입생들의 학습을 지도하던 지섭의 당당한 모습은 그 후로는 찾을 수 없다. 지섭이 조카 재민이가 정말 진규의아들인지 의심하는 부분은 독자의 관심을 쓸데없는 방향으로 끌고 간다. 지섭이, 손가락이 희고 가는 인경이 못 잊어하고, 아주 도도하고 똑똑한 '최'가 좋아했었으며, 민수가 사랑하는 인물이라면 그 만한 매력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지섭이 동료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도망치듯 입대한 것이야 수긍할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제대 후 그가 '신음하는 거리를 떠돌며' 술만 마셔댄 시간은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해당한다. 지섭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는 곳은 마지막 에필로그이다. 지섭의 행동은 이 소설의 시작 이전과 끝 이후에 있다.
이에 비하면 민수의 성장은 보다 구체적이다. "화려한 만큼 죄스러웠던 경력을 가진" 아버지의 세계와 "그렇지만(죽었다 깨어나도) 선생님은 잘 모르실거예요" 라고 말하는 섬유공장 노동자 연순의 세계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싸우는 민수는 지난 80년대의 초반을 산 젊은 대학생의 투쟁 대열 속에 당당히 서 있다. 민수는 스스로 자기가 서야할 세계를 선택하고 그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호신, 동윤과 찬식이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민수가 현장으로 들어간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적어도 민수가 그런 결심을 하고 미혜를 찾아간 시점이 3부의 첫머리이며, 미혜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야학의 졸업식을 끝마치고 시위 도중 연행되었다가 풀려나와 지섭과의 관계를 정리한 뒤 떠나는 시점이 3부의 끝이자 소설의 결말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민수의 번민과 고뇌와 변모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
명자의 편지를 보여주면서 동윤이 털어놓는 고백은 과장이나 꾸밈으로 볼 수 없는 진지한 것이다. 호신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증오심을 드러내는 미혜의 자기비판은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겠다는 열정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인물들의 창조가 이 소설을 읽어볼만 하고 권할 만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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