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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8 | 칼럼·시평 [문화칼럼]
문화의 힘 보여준 300호의 무게
박명규 서울대 교수(2013-07-29 16:56:05)

문화저널이 300호를 맞이했다고 글 부탁을 받았을 때 막 독일 출장을 떠날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새로운 글 청탁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거절하질 못하고 반 승낙하게 된 까닭은 아마도 지난날 문화저널과 관련된 이런 저런 분들과 맺은 인연들이 순간 떠올랐던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하튼 뜻 깊은 축하의 지면을 채울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300호라는 긴 시간 힘든 일을 해 온 문화저널 관계자들, 그리고 이들을 성원해준 독자들 모두에게 마음을 담아 인사를 전하고 싶다. “축하합니다.”

독일의 오래된 대학도시 튀빙겐에서 3일간 회의를 하면서 적절한 규모의 도시가 자기 문화와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꼈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 오래된 흔적과 모습을 고스란히 지닌 골목들, 크지 않은 상점과 부산스럽지 않은 풍경이 참으로 푸근하게 다가왔다. 시청 앞 광장에 밤늦도록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는 젊은이들, 길거리 카페에서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는 노부부, 네카 강에 작은 나룻배를띠우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모두 이 도시의 생기와 활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회의공간으로 제공된 오래된 고성의 분위기도, 주말에 열린 벼룩시장도 크지 않은 도시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

한국은 역사가 오랜 나라이지만 지방의 독자성과 역사성을 건물이나 도시 거리의 모습을 통해 확인하기 쉽지 않다. 오랜 이야기가 농축되었을 건물이나 공간들이 잘 보존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남아있는 것조차 화려한 근대적 시가지와 건물외양에 가려져 보이질 않는다. 전통적인 중앙집권구조와 식민지 개발, 전쟁의 유산도 있고 한국 특유의 압축형 근대화가 초래한 일방적 기능주의의 탓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지방자치제가 자리잡은 이래 각 도시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여러 가지 문화상징물을 건립하거나 각종 행사들을 기획한 덕택에 달라진 부분들이 없지 않지만 ‘지방성’을 드러내려는 곳에서도 고유함이나 독특함보다는 어설픈 모방이 더 기승을 부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저널이라는 매체의 소중함이 매우 크게 느껴진다. 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에 무형의 문화 자산으로 살아있는 지역의 역사성을 섬세하게 드러내려 애를 썼고 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음식 속에, 명절날의 잔치문화에, 애환을 드러내는 방식에, 일터에서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에, 사라져가는 시골장터에, 파란만장한 민족사와의 조우 속에 지역 고유의 역사성이 살아 있음을 이 매체는 잔잔히 그리고 꾸준히 보여주었다. 요즘처럼 인터넷과 SNS가 기승을 부리고 영상매체의 힘 앞에 웬만한 출판사의 기획서적도 장기지속하기가 어려운 환경을 고려할 때, 지역에 근거한 작은 저널이 이처럼 지속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고 축하해 마땅하다.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그것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삶의 현장, 그것의 축적으로서의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려는 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집합적인 활기를 존중하는 시선은 한국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국가라는 말을 21세기 현장에서 확인시켜주는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문화저널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여백과 소박함이다. 문화저널 초기에 한국사회는 정신적으로는 여유가 없었고 정치적으로는 조급했다. 이념적인 논쟁이든 학술적인 토론이든 늘 격정적이었고 정답을 찾으려 했으며 그 결과 엘리트적인 분위기가 강했고 때론 교만한 태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저널은 늘 사람을 주목했고 과잉된 정치적 계산이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평범한 삶을 주목하는 겸손함이 있었다. 그 때문에 간간히 비난도 받았고 때론 업신여김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문화저널은 이제 300호라는 무게감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확보했고 진정한 문화적 역량이 어떤 것일지를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앞으로도 문화저널은 그 여유로움과 진솔함, 평범을 소중하게 여기는 겸손함으로 지역의 독자성과 고유함을 밝혀내는데 기여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언젠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지역 차원에서, 일상인의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연구자가 이 문화저널을 기초자료로 하여 새로운 한국 현대문화사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저널의 표지에서 만나는, 평범하지만 깊은 삶의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자리하고 있는 건강함과 자부심이 전주 지역을 중심으로, 또 문화저널을 읽는 독자들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커져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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