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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9 | 칼럼·시평 [문화칼럼]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들 그들의 세상을 위하여
문학(인)에 대한 정치적 탄압 사태에 대한 단상
류보선 문학평론가(2013-09-02 17:34:21)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은 것은, 그러니까 하위주체는 이제까지 자신의 삶과 고통과 원망에 대해 말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말한 것은 가야트리 스피박이었다. 그런가 하면 문학이란 발언권이 없는 사람들의 발언을 대신해주는 인류가 가진 거의 유일한 형식이라고 말한 이도 있다. 멕시코 문학을 대표하는 푸엔테스의 말이다. 종합하자면 문학은 한 사회로부터 ‘쓸모없는 실존’으로 격하된 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대신해 주는 것으로 (주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정치와 또 다른 방식으로 그 사회의 미래를 재기획하는 거의 유일한 제도이다. 그렇다면 그리고 그러므로 문학에 있어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문학(혹은 문학가)의 말을 제한하는 것은 한 개인의 표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오랜 역사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이들의 한 맺힌, 그러나 그 누구의 것보다도 순수하고 혁신적인 말들을 억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위주체들의 한과 꿈을 대신 말해주는 문학의 표현의 자유는 이유없이, 유보없이 보장되어야 하건만, 어쩐 일인지 최근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은 듯하다. 황지우식으로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에 관한 한, 우리의 근황은 위독하다. 선거가 끝나고 우리가 기대한 것은 ‘국민대화합’이었다. 선거란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사람들의 다툼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궁극적으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모든 것을 걸고 경쟁하는 그야말로 선의끼리의 경쟁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발전시키고 동시에 그 구성원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서로 비판하고 토론하고 보완하고 가다듬고 하며 경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거인 것이다. 때문에 비록 선거 과정에서는 서로에 대해 잡아먹을 듯 각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선거가 끝나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배려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만 공동체 전체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거 후에 자연스럽게 ‘국민대화합’을 기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데 이번 선거 후는 그렇지가 않다. 국가기구 차원에서 고소고발이 잇따르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문인들이 선거 기간 중에 행한 말을 두고 이루어지는 기소는 집요하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정권교체를 하자는 젊은 문인들의 원칙적인 표현을 문제삼는가 하면(이것이 특정 후보자를 지원하는 표현이라는 것이 기소 이유인데, 그렇다면 지금의 박근혜 정부는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아닌가(?)), 어떤 사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 것을 두고 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하고 비방할 목적의 글이었다고 규정하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더니 결국 한국문학의 미래를 가장 활달하게 개척해가던 한 시인이 스스로 절필을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는 2010년대 한국판 카프카적 의미의 공포정치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1960년대 『광장』(최인훈)이 재현했던 정치적 공포의 재연이라 할 만하다. 카프카는 『소송』에서 죄가 있는 사람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소환해놓고 죄를 고백하도록 하는 정치 형태에 대한 공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최인훈의 『광장』 역시 그 사람이 지은 죄가 있어 죄인으로 소환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죄인으로 규정하고 죄를 강요하는 정치 행위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를 표현한 적이 있다. 아무리 정치적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앙금이 생겼다 하더라도 먼저 죄인으로 만들기로 하고 사후에 어떤 것을 죄목으로 갖다 붙여서는 안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야만적이며 공포스러운 정치이겠기 때문이다.

최근 역사의 반복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아버지에 이어 딸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일 때문에 이전 역사의 악몽을 곧바로 떠올리지는 않을 터이다. 우리가 역사적 악몽의 반복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아버지를 좇아 딸도 절대적인 인과율을 모든 국민들에게 강요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아버지에 이어 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우리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쉽게 극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긴 대통령의 딸이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해 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러한 업적을 위해 지나간 정치가 아니라 그 정치에 맞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사회를 염원했던 문학으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염원했다. 말로만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 되는 나라가 되기를 진정으로 바랬다.

하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그것과 전혀 다르다. 특히 하위주체들의 고통과 염원을 대변하는 문학적 표현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은 치명적이며 지나간 역사적 악몽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현 상황에 대해 너무 섣부르게 판단할 것일까. 부디 이 예측이 틀리기를! 그래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하위주체들의 순수한 마음을 기록해주던 그 활기찬 시인의 활력 넘치는 시어들과 다시 조우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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