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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 | 칼럼·시평 [문화시평]
‘淸 얼라이브’ 다시 보기
문윤걸 교수(2014-11-03 16:19:39)

얼라이브다시 보기

 

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

 

필자는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개막작품인 Alive“에 대해 논하는 것에 부담이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글을 쓴다. 전주세계소리축제는 한국 전통공연예술의 정수, 판소리의 본산인 전라북도가 지역의 공연예술 자산을 총동원해 치르는 축제이므로 이 축제의 개막작품이라면 그 위상에 걸 맞는 관심과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더욱이 이번 소리축제의 개막작품은 제작의도에서 밝힌 것처럼 조직위 입장에서는 판소리의 혁신적 진화를 모색한 작품이어서 문제작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작품이다. 그런데 언론에 잠깐 관련 기사가 비친 이후 그 어느 곳에서도 개막작품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해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전라북도 대표 축제인 소리축제의 개막작품에 대한, 그리고 심혈을 기울인 연출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직위원이 아닌 지역문화예술계 종사자로서 또는 관객으로서 작품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글의 범위는 소리축제 전반에 대한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것이 아니며 오롯이 개막작인 Alive’에 국한되어 있음을 말해두고 싶다.


소리축제는 우리 지역의 자랑이며 지역의 상징과 같은 문화자산인 판소리에 근간을 두고 있는 축제이다. 그래서 이 축제에서 가장 소중히 다루어야 할 자산은 그 무엇보다 판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개막작품인 얼라이브는 판소리의 현대적 계승 또는 창조적 변용을 목표로 한 시도였으며, 궁극적으로는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공연예술 가능성을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서 소리축제의 정체성은 물론 소리축제가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대내외에 명확히 보여 주는 의미있는 시도였다.

문제는 과연 그러한 시도가 의도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얻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소리축제 개막작 Alive’가 거둔 성과에 대해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하겠다. 첫 번째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이 전혀 공연예술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도가 첫 걸음부터 찬사를 받거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다. 뛰어난 대가들의 초연이나 새로운 형식을 완성한 위대한 예술가들의 경우도 그랬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에 대한 관심의 정도는 다르다. ‘얼라이브가 새로운 시도로서의 의미를 찾으려면 최소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어야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작품의 제작의도가 판소리의 혁신적 진화를 모색하는 것이라 했지만 혁신적 진화가 성공적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혁신적 진화를 풀어간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이 작품은 창법과 이야기는 원형 그대로 지키면서 편곡과 연출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낸 공연이라 했다. 이 말은 제작의도에서의 혁신적 진화, 새로운 스타일의 공연을 의미하고 그것은 편곡과 연출을 통해서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스토리를 원형 그대로 지켰기 때문에 심청가의 본래 주제와 의미에는 변화가 없고 그 의미를 담아내는 그릇(형식)만 부분적으로(판소리 창법을 원형 그대로 유지한다 했으므로) 바꾸는 시도였으므로 심청가의 주제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같은 것은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연출자는 심청가를 담아내는 그릇의 부분적인 변화를 심청가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착각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즉 새로운 스타일을 돋보이게 하는 전략으로 사용한 현란한 음색과 과도한 이미지들, 그리고 느닷없는 오마주들에 대한 몰입이 과잉된 나머지 그것이 새로운 주제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 아닌가 말이다. 이러한 의구심은 스토리 라인과 무대연출의 불일치로 산만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던 극의 진행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 심청가는 그 자체로 스토리 라인이 완벽한 드라마이다. 더욱이 연출자는 얼라이브가 뮤지컬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형식의 작품인 경우 그것이 영화이건, 드라마이건, 소설이건, 무용이건 작품 초반에 등장인물들에 대해 확실한 캐릭터를 부여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의 속성을 빨리 이해하고 스토리 라인을 쉽게 파악함으로써 공연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출연자들의 역할을 수시로 바꾸면서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파악하는 데 혼란을 준 나머지 끝까지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했다. 더더욱 출연자들의 헤어스타일이나 바이크 라이더를 연상시키는 의상, 그리고 시카고 같았던 도시 배경화면을 포함해 일부 개연성을 찾기 어려운 무대효과들은 작품에 대한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 작품이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릇의 변화만으로 의미의 변화를 동시에 시도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제작의도에서 이야기의 구성과 판소리 사설은 심청가 원형 그대로 유지한다 했으므로 새로운 스타일이란 편곡과 연출에 국한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그릇으로도 기존의 주제의식과 의미를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연출자는 형식의 새로움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주제의식을 도출하려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의도는 사실 작품의 제목이 얼라이브였다는 것에서 이미 예견되었다. 작품의 제목부터 이미 일반적인 심청가의 의미나 주제, 효녀심청과는 차별화된 주제, ‘다시 살아 온심청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출자는 다시 살아 온심청을 통해 무엇인가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인데 다시 살아 온심청은 어떤 심청이며 무슨 메시지를 던지려 했던 것일까? 이는 피날레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피날레 장면은 섬뜩했다. 좀 과하게 말하자면 다시 살아 온심청은 좀비같았으며, “아버지 제가 보이시나요?”라고 묻는 어린 심청의 물음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품의 제목 얼라이브에서 통상 다시 살아 온심청을 통해 행복한 결말, 새로운 희망을 보는데 생각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는 어긋났다. 작품의 결말을 보면서 연출자는 혹시 효심 대신 심청이 자신의 불행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방관자적 삶 때문에 인당수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으며 다시 살아 온심청은 주변 사람인 우리들 모두의 은폐된 원죄를 드러내는 것이라 말하려 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라이브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성찰의 메시지였던 것은 아니었나 말이다.


필자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얼라이브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 역시 성공한 의도로 판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 어느 곳에서도 무엇이 우리의 원죄인지, 또 왜 우리가 다시 살아 온심청을 주목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성찰이라는 깊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극의 진행과 아무런 상관없는 장면들의 삽입은 더더욱 작품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게 했다. 그렇게 불친절하게 극은 진행되었고 마침내 끔찍했던 피날레 장면으로 우리를 몰고 간 것이다.


결국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얼라이브는 심청가의 의미나 주제가 갖는 철학적 인식과 사유에 대한 새로운 물음이 아니었다. 판소리라는 전통 공연형식을 현대적 스타일의 공연형식으로 변화시켜 보려는 시도였지만 새로운 스타일마저도 수많은 컷을 모아 만드는 영화적 기법을 지나치게 중시하면서(판소리마저도 이미지 컷을 위한 배경음악으로 활용되고 말았다) 판소리의 중요한 의미인 이야기는 사라지고 현란한 이미지들만 남기고 말았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만을 들어 이 작품을 지지하지 못하겠다. 심청가를 얼라이브하지 못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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