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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 | 칼럼·시평 [문화칼럼]
재래시장에서 만나는 쓸쓸함
이병초 (2015-02-02 16:48:08)

반나절이라도 짬을 내서 아무 시외버스나 타고 눈길에 닿는 읍, 면에 내려 개천을 따라 걷는 게 요즘의 내 즐거움이다. 세상살이와 관계없이 의연한 산과 잎이 다 떨어진 나무와 꽃대와 피마자를 옆에 낀 개천길을 모처럼 얼쩡거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개천 너머 재래시장을 알리는 굵은 글씨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무작정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비가 줄줄 샐 것 같은 목조건물을 헐고 현대식으로 단장한 시장이지만 거기 가면 싸릿대를 칡넝쿨로 엮은 산태미며 둥글게 사리지워진 고사리 뭉치며 분을 뒤집어쓴 곶감들이 수북할 것이라고, 사람들도 북적거리지 않겠냐고 미리 들떴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들른 재래시장은 한산하기만 했다. 운 좋게 장날을 만났을 때도 손님들은 거의 없었고 상인들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2004년 재래시장 특별법을 제정한 후 입지여건이 취약한 시장과 시설수준이 취약한 시장, 상인조직이 취약한 시장, 경영역량이 취약한 시장 등에 무려 2조 원 가깝게 지원했다고 한다. 그 결과 수백이 넘는 재래시장의 시설개량이 이루어졌고 고객만족도도 높아졌다던데 내가 가본 시장은 왜 이리 썰렁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부가 10년 넘도록 지원했어도 재래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제기된 문제들- 같은 상품인데도 기존의 시장보다 비싸거나, 비위생적이거나, 상품의 생산지며 생산자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주차문제 등이 안고 있는 편의시설이 형편없으므로 시장이 썰렁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또한 이 문제점들을 개선하면 전국에 산재해 있는 재래시장이 지역 주민들이 생활권 시장이 되며, 인근 도시의 소비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활기찬 시장이 될 수 있는지 그것도 꽤 골똘하게 생각해 보았다. 볼거리 먹거리 팔거리 살거리 놀거리 체험거리 등을 개발해냈고, 공동 쇼핑몰 운영 및 SNS 기반의 바이럴마케팅을 갖추었으며, 분산된 가계를 업종별로 집중화하는 한편 달인이 운영하는 맛집까지 들여놓으면 재래시장은 경쟁력이 갖춰지는가. 기존의 대형할인점이나 대형마트, 백화점뿐만 아니라 인터넷 쇼핑몰, 아파트 단지 내에서 열리는 일일장터, 새벽장터, 주말장터에까지 몰리는 고객의 발길을 재래시장으로 돌리게 할 수 있는가.

어떤 방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재래시장을 살려낸 곳이 있다고 어떤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방문하는 모습이 방송에 자주 비치는 것과 관계없이, 총선 또는 지방선거가 있을 때마다 재래시장을 경쟁력 갖춘 시장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공약과도 관계없이,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장흥 토요시장과 강원도 정선 5일장, 서울 자양골목 전통시장 등이 그곳이다. 지금도 장이 설 때마다 대목장처럼 성황을 이루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거기도 사람보다는 가격표가 고객의 눈에 먼저 띠는 장터일 것이다. 이윤을 창출해내기 위해서 배려라는 문화가 들어설 틈이 없는, 부모형제 고향산천도 몰라보는, 세상에서 제일 천한 게 돈이라는 그 이 최고 대접을 받는 기존시장의 또 다른 울타리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경쟁관계일지언정 동업자가 분명한 상대 상인들을 쪽박 차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윌리엄 블레이크가 악마의 맷돌이라고 언급한 천민자본주의의 구도에 재래시장도 휘말린 셈이다. 돈을 벌어두지 않으면 미래에 거지로 살 수밖에 없다고 몰아붙이는 경제공포, 누가 이따위 위협에 가까운 공포감을 조성하는지도 모르고 재래시장도 기존시장의 허울에서 못 벗어난 꼴이다.

내 발길은 개천에서 멈췄다. 오늘도 재래시장이라고 적힌 굵은 글씨가 내 눈길을 잡아끈다. 하지만 저 곳도 사정이 다르지 않을 터이다. 돈이 신앙이 되어버린 세상이니 지금까지 꾸어왔던 꿈을 포기하지는 못하리라. 나는 저 시장에서 짚으로 꾸러미 진 계란 한 줄의 체취며 들깨를 됫박으로 고봉째 퍼주는 씀씀이도 못 만날 것이다. 도토리만으로 쑨 진짜 묵을 내놓으면서 이기심을 버리면 먹고사는 데 큰돈이 들지 않는다고, 언제까지 떼돈 벌어오라고 강요하는 정신적 거지들에게 시달릴 것이냐고 쫀득거리는 묵의 빛깔로 내 눈을 바라보는 표정도 못 만날 터이다. 사람들이 곱든 밉든 나는 그 속에서 커왔고 구질구질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사람냄새 땀냄새에 절여져서 세월이란 것을 몸에 담았으므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데 그 바람은 오늘도 나를 쓸쓸하게 하리라.

버스를 타려고 발길을 돌린다. 소읍의 개천을 거슬러 걸으며 입술에 매달린 쓴 맛을 담배연기에 섞는다. 돈을 많이 가지면 행복해 질 것이라는 전제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망상妄想이라고 나는 어떤 글에다가 썼던가. 재래시장만큼이라도 상인과 고객은 있으되 사람이 없는 자유방임적 무한경쟁에서 벗어나자고 나는 그 글에서 고집했던가. 재래시장이란 말이 갖고 있는 품에 파고들어서 돈이 준 고통스러운 기억과 사람다움이 버무려진 이율배반적 존재의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날들이 새소리처럼 햇살에 섞인다. 언젠 그런 시장을 만나겠냐는 듯 그러나 꿈은 버리지 말라는 듯 짐승들의 낮은 숨소리를 끼고 개천이 흐른다.

     

약력

전주출생. 1998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밤비』『살구꽃 피고가 있으며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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