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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 | 칼럼·시평 [문화칼럼]
언어의 사대주의
이이화(역사문제 연구소 고문)(2015-05-18 17:57:37)

 

 글쓰는 이는 중국 조선족의 동포를 안내하여 명동일대를 돌아본 적이 있다. 그는 70대 노인으로 연변대학에서 한국근대사를 평생 연구한 학자이다. 그가 조국을 떠날 적에, 그 동안 한국의 여러모습을 돌아본 감상을 물어 보았다.

 "물질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누리고 학문 문화의 수준도 높군요. 그런데 명동 등 상업지역만이 아니라 온통 영어로 간판들이 뒤덮여 있고 방송·잡지에서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는 모습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참 알 수가 없네요."

 그의 지적은 너무나 옳았고 글쓰는 이도 이런 꼴을 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문학 예술의 분야에서 멋으로 또는 적당한 번역어가 없을 적에 곧잘 외래어를 쓰는 풍조가 있었다. 해방이 되어, 서양문화 특히 사람들과 미국의 상품이 밀려들자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판을 쳤다. 그런 속에 대중들이 마구잡이로 영어를 써댔다. 그랴야 유식하게 보이고 잘난 사람으로 쳐주기 때문이었다.

 젊은 사람들 입에서 서슴없이 수건을 '타올' 손수건을 '행커치' 열쇠를 '키' 공책을 '노트'라고 부르는 따위 영어 발음으로 불러댔다. 그러면서 아무런 저항심이나 반성도 없었다.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어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더욱 다양한 외래문화가 유입되자 이런 풍조는 가속화되어 갔다. 그래서 생활 용어만이 아니라 전문분야에 외래어가 깊이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외국 유학생 출신들이 주도하였다.

 서울대학에서 교수들의 강의를 들어본 사람들은 영어를 모르면 강의 내용을 거의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한다. 강의를 하는 교수들은 이른바 '미국박사'들이다. 말이 이러니 그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적 이론만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그래도 이는 전공분야의 강의이니 넘어가 보기로 하자.

 첫째로 언론매체에서 보이는 외래어이다. 아침에 텔레비젼을 탁 틀면 뉴스 데스크니, 뉴스 굿모닝 코리아니 하는 보도 제목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된다. 이어 그 뒤의 보도시간에는 어김없이 뉴스 네트워크, 뉴스 와이드, 뉴스 파노라마 따위의 보도 제목을 만난다.

 이어 연속극을표시하는 제목이나 일반 풍속을 소개하는 이름들도 웨딩 드레스, 뉴욕 스토리, 드라마 스페셜 따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이 등장한다.

 잡지 이름도 마찬가지다. 뉴스 프러스도 있고, 윈도 있고, 엘레강스도 있고, 에버도 있다. 잡지 제목은 아마 외래어를 쓰는 경부가 오분의 사쯤 될 것 이다. 상품표시에는 그 보기를 들 것도 없이 더욱 극성스럽게 외래어를 남용하고 있다.

 둘째는 이런 언론 매첵가 상품표시의 분위기를 타고 일반 생활용어로 번져 나갔다. 체육은 실종되고 스포츠가 우리말로 굳어졌다. 상점이나 가게는 없어지고 슈퍼로 통한다.

 무슨 여관이니 장(莊)이니, 무슨 옥(屋)이니, 식당이니 하는 꼬리 말은 모텔이나, 그린이나, 가든으로 거의 바꾸어 부른다. 간판을 이렇게 바꾸어 불러야 고급스럽고 촌티를 벗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이 따위 외래어는 말할 것도 없이 원어의 어법에도 맞지 않고 그 뜻도 변질되어 있다. 그러니 중국 동포들이 보고 그 뜻을 모르는 것은 제쳐 두고라도 그 남용에 이해할 수가 없어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 동포들이 이런 외래어 남용을 이해 못하는 조건이 또 따로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북한의 영향을 많이 받아 왔다. 중국과 북한은 외래어를 거의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썼고,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면서도 영어에는 익숙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너무 심하였다. 이렇게 외래어를 마구 쓰다 보면 그 원산지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자라게 되고 그들이 만든 상품이 무조건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 나라의 재벌들은 우선 상품을 팔려는 욕심에서 외래어 딱지를 상품에 붙여 팔아 먹어 왔으나 지금에 와서는 우리 상품은 보잘 것 없다는 국민의식이 팽배해져서 재벌들의 상품을 외면하고 있다.

 긴 안목으로 볼 적에 이런 작태는 결국 자신의 묘혈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조건에서 아무리 '아이 엠 에프' 시대를 극복합시다'라고 떠들어도 공염불이 될 것이며 '우리 경제를 살리려면 우리 상품을 삽시다'라고 외쳐 보아도 코방귀를 뀔 것이며 "우리의 주체의식으로 자주 통일을 이룩합시다"고 주장하여도 한 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글쓰는 이는 언어의 국수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전문용어나 특수한 문화의 용어는 원음을 그대로 써도 별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앞에서 텔레비젼이라는 말을 썼다. 나아가 문화저널이라든지, 라디오라든지 문학장르라는 정도의 외래어는 얼마든지 쓸 수 있어야 한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약속이 언어 구조에 맞지 않고 혼란과 자못된 의식의 왜곡을 가져 온다면 이야말로 독약이 될 것이다.

 우리 다 같이 한 번 이 문제를 꼼꼼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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