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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 | 칼럼·시평 [서평]
밥을 먹다가 반해버린 밥맛
- 정양의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창작과 비평사 1997 -
정철성(문화저널 편집위원)(2015-05-27 10:13:43)


 좋은 시들이 그렇지만 정양 시인의 시에도 다 표현해버린 것 같은 시의 뒷켠에 말하지 아니한 것들이 숨어있다. 그런 것들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은 다른 일로 대신할 수 없는 독특한 체험이다. 시를 읽으면서 이런 즐거움을 얻는 것은 어설픈 비유를 빌리자면 밥을 먹다가 맛에 반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지난번 『빈집의 꿈』이 보여주었던 참담한 단절의 세계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다면 이번에 니온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에는 웃음이 끼여들 자리가 있다. 세월의 흐름이 날라온 여우가 새 시집에는 자연스럽게 쌓여 있다. 이 시집을 읽어본 내 친구 하나는 -그는 거의 시를 읽지 않는다- 「토막말」에 나오는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 막말'이 일품이라고 감탄했다. 그러면서 그런 말을 시에 써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수선리의 풍경을 그리는 시들에서도 허전하지만 비릿한 웃음을 자아내는 시들이 눈에 뜨인다. 정양 시인이 완주 비봉 '무난골'에 거처를 정한지 이년이 넘었다. 그가 도시를 뒤로 한 것을 최근의 역류현상 가운데 하나로 보아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자, 논밭이 묵어나게 생겼는데 돌아가야지'라고 노래했을 때 직업이 시인이었던 소동파가 농사가 걱정되어 돌아가려던 것이 아니었듯이 정양 시인이 시골살림을 시작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개쟁이를 따라가 "생판 모르는" 산기슭에 터를 다듬어 이사할 것을 결심했을 때 그는 "뻔뻔해진 이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견뎌볼 셈이었다. 그 동안 피폐해진 농촌의 일상을 그려낸 소설과 시들이 적지 않았다. 전북의 예를 들자면, 김용택이 그린 진메마을이 문학사의 지명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물론 정양 시인이 그리는 무난골은 진메와 다르다. 여기에는 자본이 그리는 "탐욕과 파멸"의 분위기가 더욱 진하게 나타난다. 무난골을 그리는 시들에는 개, 까치, 개구리, 청둥오리, 너구리, 황소개구리 등 다양한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사람들는 산토끼탕을 추렴하여 술판을 벌인다. 이 가운데 가축이라면 개를 들 수 밖에 없을 터인데, 다른 동물들이 한두 번에 그친다면 개들은 역시 단골로 등장하여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개장수가 와서 김씨가 개들을 팔아버린, 흔하다면 흔하고 별일 아닐 수 있는 사건을 그린「무게」는 여운을 남기는 시이다. "근당 사천오백원"씩 무게로 흥정을 하는데 "앉은 저울"로 무게를 달아야 하는지 김씨 더하기 개 무게 빼기 김씨무게는 개 무게, 이런식으로 무게를 달아 개를 판다. 여기서 마지막 연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김씨는 다시 저울 위에 올라

혼자 무게를 잰다

마지막 무게가

저울추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것은 마지막 무게이지만 본래는 김씨가 처음 저울에 올라갔던 무게이기도 하다. 그 차이라니! 김씨가 자신의 몸무게를 다시 달아보는 것은 혹시 손해를 보지 않았나 하는 얄팍한 계산 때문일 것이다. 이른 봄에 개를 팔아야 할 어떤 사정이 김씨에게는 있다. 그러나 자기 몸무게를 혼자 달아 보는 순간 사라진 무게들이 무겁게 처진다.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세상을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다. 저울 위에 한 번도 빠짐없이 올라간 것은 키우던 개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김씨는 모르고 있다.

 김씨의 무지가, 아니 우리들의 무지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정양 시인은 "허무나 그리움 같은 폭폭한 것에 인박하여 그 면역과 건망증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한 세상을 살고 있다"고 후기에 적어 넣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면역기능이 아니라 타성에 젖어 생겨나는, 아주 만성이 되어 버렸다는 의미의 '면역'은 전라도 사투리의 독특한 역설을 보여준다.

 시인은 건망증을 통해서 "망할 것들이 여간해서 안 망하는" 이유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건망증을 의식해서 일까 아니면 때가 이르렀기 때문일까 그는 이번 시집에서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던 과거사를 한쪽에 모아 놓았다. 과거의 무게는 삶의 무게 만큼이나 무겁게 시인의 의식을 압박한다. 4부에 묶인 시들은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애증의 세월을 증류기에 담아 맑은 액체로 뽑아낸다. 이제 더 이상 말 못할 과거가 없다고, 세상이 변하기는 변했다고 하더라도 과거를 들추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불변이다. 「이슬」에서 시인은 "미움이 그리움이 저렇게/ 눈부시게 아름답다면//부대끼며 남은 것들이/ 못 견디게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맘놓이리" 라고 노래한다. 살아남은 것들 역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지상을 떠날 생명체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세월을 살았다.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앞서 말한 숨김의 기교가 언어가 붙잡을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편이 아니라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다 참아버리고 말았"던 것처럼 포기 또는 검열의 결과라면 진정성에서 떨어진다고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실을 알고 싶은 욕구는 대리만족을 찾는다. "몹쓸 세월의 덫"이 흉악했던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시인을 언어의 벼랑 끝에 몰아세우며 용감하게 나아가라고 재촉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시인이 시집이라고 엮어 시장에 내놓는 게 못할 짓이라고 불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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