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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 | 칼럼·시평 [문화칼럼]
협력과 공존, 다시 문화다
이원재(2015-08-17 15:06:03)

 

 

결국 삼성물산 주주들은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승인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1996년말 증여받은 44억원의 현금으로 주식을 사들이는 것으로 시작해, 이제 삼성물산이 보유한 7조원 어치 이상의 삼성전자 주식을 지배하게 됐다. 3세 승계가 순조롭게 마무리를 짓는 모양새다.
이 3세 승계 프로젝트를 삼성 일가의 일일 뿐이라고 쉽게 눈감고 넘어갈 수 없는 이유는, 그 과정과 결과가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삼성물산을 둘러싼 지분 다툼과 삼성의 3세 승계 과정은 ‘세습’이라는 묵직한 한 단어를 한국 청년들의 마음 속에 다시 한번 되새겼다. ‘세습’이라는 단어는 청년들에게 ‘한국사회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아버지를 잘 만나서 재산을 물려받지 않고서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면, 땀흘려 일해야 할 이유는 현저하게 줄어든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은 선의의 경쟁이다. 기업들이 좀 더 나은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며 일하는 방법을 혁신하면서 경제가 성장한다. 공공기관과 비영리단체들이 사
협력과 공존, 다시 문화다
문화칼럼회에 필요한 가치를 더 잘 만들어내기 위해 땀흘리며 혁신하면서 사회가 진보한다.
하지만 경쟁의 판을 벌여 놓는다고 반드시 역동성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회의 평등’이 필수적이다.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누구든지 같은 출발선에 서 있다고 여겨지면 경기의 역동성은 가장 높아진다. 모두가 더 잘 달리려고 노력할 유인이 더 커진다. 누구든지 이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10미터 앞에서 출발한다면, 누군가는 50미터 앞에서 출발한다면, 누군가는 출발 전부터 이미 이긴 것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참여한 선수들은 의욕을 잃고 경기는 역동성을 잃는다.
선의의 경쟁이 더 나은 사회로 이어지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협력’이다. 경제학에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이름의 게임이론 모델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서로를 전혀 모르는 두 명의 죄수가 각각 다른 방에서 취조를 받고 있다. 두 명 다 범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둘 다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둘 중 하나만 자백하고 나머지 하나가 자백하지 않으면, 자백하지 않은 쪽만 중벌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결국 둘 다 자백하는 상황이 오고 만다는 내용이다. 둘 다 자백을 거부하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인데도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수 두 명이 서로 신뢰하는 사이이거나, 서로 대화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자백하지 않고 풀려날 가능성이 높다. 협력을 통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한 번 결정하는 게 아니라 여러 번 결정하는 게임이라면 협력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한 번은 져 주고 다음 번에 이기는 방식의 중장기적 관점에서의 경쟁 및 협력도 가능해진다.
이 단순한 모델은 사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왜 협력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경우 정글 속 야수들과 같은 극단적 경쟁은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이끌고 만다. 선의의 경쟁을 하기 위해 사람들은 협력하며, 그 결과로 공동체를 성장시킨다.
평등과 협력의 두 가지 점 모두에서 한국사회는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우선 평등이라는 측면을 보자. 사실 한국은 해방 이후 토지개혁으로 자산분배가 상대적으로 평등해졌었다. 극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소득수준도 다같이 낮아 변별력이 크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출발선에서 시작해 경쟁했던 셈이다. 그러던 한국사회에 최근 본격적으로 ‘상속을 통한 자산 형성’이 시작되고 있다. 삼성을 포함한 재벌기업들은 2세를 거쳐 3세, 4세로 경영권을 본격적으로 물려주고 있다. 1950년대 중반~1960년대 중반에 태어나 1980~1990년대 호황을 거치며 부동산 자산을 취득하고 불렸던 베이비붐 세대 중 고소득자들도 자산을 다음 세대에게 상속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상속받을 기업이나 자산이 없는 계층의 박탈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질 전망이다. 상속 없이는 계층상승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확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재벌기업들의 편법을 동원한 경영권 승계과정은 사회 전체에 ‘상속 없이는 기회도 없다’는 사실을 알린다. 이런 상황이 더 위험한 이유는, 새롭게 등장하는 청년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등지향적 세대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청년 세대가 이전의 다른 어느 세대보다도 평등지향적일 가능성은 두 가지 점에서 발견된다. 한 가지 요소는 지식 수준의 동질성이다. 대학진학률의 급격한 상승이 이를 보여준다. 대학진학률은 30여년만에 20%대에서 80%대 가까이로 치솟았다. 대학진학률 20% 시대에는 대학을 ‘특별히 우수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고 믿었다. 대학에 가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임금격차는 정당하다고 믿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불평등한 상황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기가 용이하다.
이들 모두 대졸자에 걸맞은 일을 하기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제로 할 수 있다. 즉 일에 대한 욕구와 능력이 평준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불평등은 문제가 된다. 욕구와 능력은 다들 비슷한데 보상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면 불만이 생기고 갈등이 심화한다. 또 한 가지 요소는 문화적 동질성이다. 한국의 도시화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현재 청년 세대는 도시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가 되어, 현재의 청년 세대는 디지털 및 모바일 네이티브다. 모두가 도시인이고, 모두가 디지털 네이티브인 사회는 문화적 동질성이 매우 높은 사회다.
가장 평등지향적인 세대와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만나면 파열음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자칫 서로를 파괴하는 무한경쟁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차지해야 하는 자리는 많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벼랑 끝으로 떨어져야 한다면, 선의의 경쟁은 사라진다. 이 때부터 경쟁은 목숨을 건 파괴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한국사회 모양이 지금 꼭 그렇다. 지식수준이 높아져 자격을 갖춘 이들은 많아지는데, 불평등 탓에 차지할 자리는 적어지는 모양새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우선 불평등을 해소하는 사회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일부다.
또 다른 과제는 문화의 영역에 있다. 협력과 공유의 문화를 확산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는 배제와 차별의 언어는 공포스럽다. 다른 이들을 경쟁의 대상으로만 보고 밀어내려고만 하는 정서가 확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정서가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문화운동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불평등을 해소하는 구조적 변화와, 협력과 공존을 지향하는 문화의 확산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으면, 한국사회의 미래는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을 맞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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