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20.4 | 인터뷰 [홍PD가 만난 청년]
정직과 전통의 바탕에 스토리와 디자인을 입히다
김슬지 슬지네찐빵 대표
홍현종(2020-04-10 11:42:39)


정직과 전통의 바탕에
스토리와 디자인을 입히다


정직과 성실로 최고의 ‘찐빵’을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에 ‘스토리’와 ‘디자인’을 더하여, 고향 부안에서 새로운 음식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 김슬지(36), 농촌에서 꽃피우는 그의 새로운 도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홍현종 편집위원, JTV PD




김슬지는 어떤 사람인가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하면 잘 될 것이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지금은 찐빵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안읍에 있는 ‘슬지네찐빵’이 저희 부모님 가게이고, 부안 곰소에 있는 ‘슬지제빵소’는 제가 대표로 있는 사업장입니다.”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인가요?
“학창시절 꿈은 비행기 승무원이었습니다. 부안에서 1남 3녀의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도로공사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퇴직 후, 양계 사업에 진출하셨지만, IMF를 거치시면서 집안 사정이 매우 안 좋아졌습니다. 결국 부안 읍내에서 어렵게 찐빵가게를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언니는 힘들게 대학에 진학했고, 밑에 두 동생도 학교에 다니고 해서, 저까지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고교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고는 했는데, 돈을 받으면 언니 옷 한 벌 사주고, 막내 남동생 장난감 사주는 것이 더 기쁜 일이었습니다. 대학 진학보다는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고교 졸업 후 친구가 있던 수원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도시 생활은 어떠셨나요?
“막상 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식당과 술집에서 서빙을 하고, 의류매장에서 판매사원도 해봤습니다. 기업체 안내 데스크에서도 일했습니다. 그러다 대학을 다녀야 하겠다는 필요성이 점점 생겨났고, 25살 나이에 뒤늦게 대학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생각으로는 고향인 부안보다 해볼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향 부안으로 돌아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29살이 되었는데, 엄마에게 갑상선암에 뇌출혈 증세까지 생기셨습니다. 언니는 이미 결혼을 했고, 막내 남동생은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저밖에 대안이 없었습니다. 반년 정도 엄마 뒷바라지를 해야지 하고 내려왔는데, 이미 7년이 지나버렸습니다. 당시 찐빵가게에서 아버지를 도와드렸습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굉장히 고집이 있는 분입니다. 도전정신은 물론, 희생과 인내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부분도 많으신 분이지만, 의견이 달라 다투는 일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제가 사업을 운영해보니, 아버지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찍 손수 재료를 준비하시고, 좋은 재료만을 사용하여 정말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찐빵을 만드셨습니다.”



아버지의 찐빵, 어떠셨나요?
“부모님은 좁은 가게에서 수작업으로 정말 정직하게 찐빵을 만드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제가 보기에도 이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제가 찐빵집 딸이지만, 찐빵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부터 찐빵을 사기 위하여 지갑을 열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 의문이 생겼습니다. 장사가 잘 되는 매장에 가보고, 젊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결정한 메뉴가 ‘생크림찐방’입니다. 직접 만들어보니, 너무 맛있었습니다. 저 같은 젊은 사람들도 충분히 좋아할 맛이었습니다. 가게를 찾은 중고생들과 시식을 하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결국 새로운 메뉴로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힘들게 자랐던 김슬지, 정직하게 사는 아버지가 막연히 잘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열심히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게 되고, 본인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찾게 된다.


본인의 사업을 구상하고 어떤 일을 시작하셨나요?
“아버지가 하시던 수작업으로는 승부를 걸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기계화를 통해 대량생산을 해야만 경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제 스스로 사업과 마케팅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으로 2015년 중앙대학교 창업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창업과 사업 운영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 진학 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대학원을 다니며, 신규 창업자를 위한 지원 사업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순진하게 찐빵만 만들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용기를 내어 2015년 전라북도 주최의 농업 관련 콘테스트에 참가하였지만,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2016년 같은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되고 상금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지원이 지금까지 커다란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찐빵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시작은 어떠셨나요?
“아버지가 하시던 오색찐빵만으로는 경쟁이 힘들다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메뉴에 대해서 아버지는 다소 두려워하셨던 부분도 있었지만, 젊은 고객들이 와야만 된다고 끊임없이 설득한 후에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생크림찐빵’과 ‘아이스크림찐빵’, ‘크림치즈찐빵’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5개 만들면 1~2개 팔리고 나머지는 폐기해야만 했습니다. 찐빵이라고 하면 하나에 1천 원 정도 예상하는데, 저희 제품은 원가를 계산해서 개당 3,500원이었습니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새로운 메뉴에 품질을 높인 제품이었지만 제 생각과 달리 판매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고급화 전략은 젊은 고객들에게 차츰 인정을 받게 되고, SNS를 통해서 홍보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도 소문을 듣고 외지에서 이곳 곰소까지 많은 분들이 찾아오시고 계십니다.”


슬지제빵소는 카페 느낌입니다. 어떤 곳인가요?
“제 이름이 김슬지인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4남매 중 제 이름만 한글이름 슬지로 정하셨습니다. 20년 전, 처음 가게 이름을 정할 때, 부르기 쉬운 제 이름을 활용해 슬지네찐빵으로 결정하였고, 그 이름이 이어져 슬지제빵소가 되었습니다. 현재 찐빵을 만드는 공장과 오프라인 매장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처음 슬지제빵소 간판을 다는 날, 엄청난 책임감이 밀려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곳은 아버지가 모아놓은 돈으로 조금씩 마련해 놓았던 외진 곳이었습니다. 부안 읍내에서도 떨어진 곳이지만 곰소 염전이 보이는 곳입니다. 저는 서해 바다와 염전이 눈앞에 보이는 이곳이 나쁜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카운터가 있는 1층은 물론, 2층 홀에서 바라보면, 훌륭한 자연 풍경이 펼쳐집니다. 사진 찍기에도 아주 좋은 위치입니다. 자금이 부족해서 몇 번 공사를 중단해야만 했지만, 단순히 찐빵을 파는 곳이 아닌 젊은 고객들이 만족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꾸며보고 싶었습니다. 인테리어부터 브랜드 사업까지 직접 하였기에 저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김슬지만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만의 기술을 보유하고 고유의 맛을 낸다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때부터 국산 팥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손님 중에 ‘팥이 국산이냐’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저희가 백화점이나 대형 제과점의 제품을 넘어설 수 있는 지점은 재료의 차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국산 팥을 사용한다는 것은 제품의 품질을 관리하는 면에서도 어려움이 따르는 작업입니다. 더욱이 수익을 내기에도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산 재료만을 고집하다 보니, 스스로의 ‘자부심’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국산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먼저 설명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냥 찐빵이 아닌 우리 농산물로 만든 슬지네찐방. 이것이 회사의 철학이자 기본 가치입니다.”


국산 재료만 고집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2016년 전라북도 소상공인 콘테스트에 참가하였는데, 당시 국산 재료만으로 찐빵을 만들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하였습니다. 자부심을 갖고 발표를 마무리하였는데 심사위원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우리 농산물만 고집하는 것은, 그냥 고집일 뿐이다’라는 평가였습니다. 안흥찐빵의 예를 들며, ‘수입 농산물을 사용해서, 사업을 키워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물어보셨습니다.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품에 대한 자부심만 있었지, 사업을 위해서 무엇이 중요한지 제 스스로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꼭 잘 돼서, 우리 농산물을 사용해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는 오기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더욱더 우리 농산물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었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향 부안에서 사업을 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도시에 있었다면, 오히려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도시는 경쟁이 심하고 차별성을 갖추기에도 불리한 조건입니다. 반면 농업과 농촌을 안고 가는 것은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이 갖출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100% 우리 농산물’입니다. 이런 조건은 대기업이 실행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조건입니다. 남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지점을 잘 살린다면, 충분히 경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먹는 것은 우리 농업을 안고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료에 대한 상생의지가 새로운 음식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재료가 좋아지면, 맛도 좋아집니다. 제가 추구하는 최고의 경쟁력입니다. 더욱이 요즘 사람들은 찾아다니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스토리가 있고 나만의 차별성이 있다면, 충분히 농촌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의 젊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무엇이든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안되더라고 해보자, 실패의 과정에서도 배우는 것이 있고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실패도 커다란 공부인 것 같습니다. 특히 농촌으로 돌아와서 도전해볼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제 스스로 잘한 선택이고 자랑스러운 부분입니다. 저는 농업과 농촌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할 수 있는 일도 엄청 많습니다. 아이디어와 스토리만 있다면, 농촌에서도 충분히 도전해볼 기회는 많다고 생각합니다. 도시보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기에 좋은 곳이 농촌일 수 있습니다.”


지역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청년, 농업과 농촌이 갖고 있는 의미에 문화가 더해진다면 또 다른 상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앞날에 흥미진진한 일들이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