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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 | 인터뷰 [문화와사람]
렌즈 속으로 추억의 애잔함을 불러 들여…'장터'의 사진작가 이흥재씨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3-26 16:41:17)

사진은 시간의 기록이자, 추억의 기록이다. 사각의 틀 안에 멈춰 있는 피사체들은 시간이 지나도 늙거나 남루해지지 않고, 그 때 그 순간 가장 진솔한 모습으로 남아 누군가의 마음을 일으키고 스스로 애잔해진다. 사진 속 피사체들은 정지되어 있지만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평면이지만 풍부한 입체감으로 꿈틀댄다. 누군가의 '추억'이 작용하는 한, 피사체는 언제나 살아있다. '사진…'은 그래서 기계적 산물로는 가장 정겹고 따뜻한 이름을 가졌다.
10여년 넘게 장터 풍경을 기록해온 사진작가 이흥재씨(49).
장터와 장터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상인들, 그리고 가끔씩 하릴없이 그곳을 드나드는 촌로들이 어김없이 그의 흑백 인화지에 담겨진다. 렌즈 안에 들어찬 그의 사진 속 세계는 우리의 추억을 끊임없이 담금질하고 자극한다. 소란스런 흥정이 오가고, 뜨뜻한 국밥 한 그릇이 더없이 훈훈하고, 허리 굽은 노파의 무표정이 정겨운…. '장터 풍경'은 그의 사진 속에서 그렇게 하나 하나 잊고 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 지금의 나를 뒤돌아보게 하고, 사라져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전하고자 할 것인지가, 단지 기계의 매커니즘만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카메라를 손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며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진 작업에 필요한 기술적인 테크닉이나 기능은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렌즈를 통해 세상을 읽어내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 살면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느끼는게 중요하죠. 사진은 기계적인 매커니즘만으로 완성되는게 아니라, 작가의 철학과 주제의식을 담아낼 때 완성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의 작업 공간은 전국 골골에 흩어진 시골 장터다. 남원 운봉장 순창 동계장 순창장 진안 마령장 임실 강진장 부여장 구례장... 화려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지만, 삶의 질박함이 여전히 우리 일상에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족한 풍경들이 그의 사진 속에 담겨진다.
휘적휘적 취기 오른 걸음으로 동구밖을 걸어 들어오던 늙은 아버지와 당신 몸집보다 훨씬 큰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잰걸음을 옮기던 어머니가, 그의 장터 사진 속에 있다. 거칠고 검게 그을린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때로는 쓸쓸하게 때로는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없는 것 없이 풍성하기만 하던 5일장의 풍경들이 지금은 끊길 듯 말 듯 안타깝게 남아 그의 마음을 공연히 조급하게 한다.
"세상이 갈수록 자기중심적이고 일에 의해서만 간신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사람 사이의 정이 자꾸만 소홀해지고 이해관계에 따라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있죠. 나이가 들면서 '이게 아닌데...'하는 느낌이 점점 깊어집니다. 사람 사는 냄새, 정이 흠뻑 묻어있는 곳, 그곳이 바로 장터예요. 한 잔에 4백원 하는 소주에, 그리고 국밥 한 그릇에 정이 묻어 있죠. 그런데 장에서 만났던 어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 분들 건강할 때 한번이라도 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해져요."
'사진만 찍어 오는' 작가가 아닌, 피사체들과 일상을 나누고 그들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실은 그의 이 모든 작업의 본질이다. 그는 단순히 장터 풍경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정(情)'을 옮겨놓는 작가다. 10년 넘게 장터를 오가면서 그는 국밥집 할머니와 신발가게 아저씨의 소소한 가정사까지 줄줄이 꿰어찬 장터의 별난 가족이자 이웃이 되었다.
산이 좋아, 정상에서 바라본 운해가 좋아 처음 카메라를 접했던 그는 이내 영어 교사로의 삶을 접고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로 전주대와 동국대 대학원에서 미술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하며 시각예술에 대한 이해와 사물을 보는 시각을 넓혀왔다. 그의 공부는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변치 않는 미적 기준과 장인정신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고 있다.
그는 옛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저 좋아서 좋은 것으로 머무르지 않고,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천착해 나갈 때 자신의 작업이 더욱 풍부해진다고 믿는다. 그는 "20년이 채 안되는 사진 경력이지만 이만큼의 성과와 의미를 일궈올 수 있었던 건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사명감과 공부하면서 느꼈던 앎의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장터에서 조금씩 발길을 옮겨 방앗간과 정자와 주조장으로 향할 계획이다. 시대에 밀려 안타깝게 사라져 가는 것들을 그의 렌즈 속으로 끌어와 더 많은 추억을 기록하고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나 저의 화두는 사진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는 겁니다. 문학 작품이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건 진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죠. 사진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풀잎에 맺힌 이슬 하나에도 스스로 표현하기 힘든 흥분과 감동이 어리는데, 이런 느낌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욕심에 카메라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제 삶도 그 속에서 편안함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과 소주잔을 함께 기울이며 적당히 얼큰해진 분위기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의 사진이 정감 있고 편안한 것은 바로 피사체들과 동화되려는 작가 스스로의 노력이 담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장터 사진은 수사가 없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거나 피사체를 연출하지도 않는다. 칼라 아닌 흑백 인화지를 쓰고, 렌즈도 넓게 보는 광각이나 좁혀보는 망원이 아닌, 실제의 사물과 가장 유사하게 보인다는 표준렌즈를 고집한다. "강렬한 느낌보다는 보면 볼수록 깊이 있는 사진을 남기고 싶고, 무엇보다 잔잔하고 소박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작가마다 동일한 피사체를 소재로 하더라도 그에 대한 느낌과 메시지가 다를 수 있는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사진적 시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러나 작가의 '사진적 시각'으로 포착된 피사체들은 그에게 있어 그저 '대상'이나 '소재'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작가와 피사체 사이의 정서적 공유와 교류, 그는 그것을 장터 전시회를 통해 이뤄냈다. 몇 해 전 장터를 전시장으로 탈바꿈시키고 사진 속 주인공들을 관객으로 초대해 새로운 감흥을 함께 나눴다.
"장터에 이젤 놓고, 그 위에 사진을 전시했었죠. 돼지머리에 막걸리 차려놓고, 소리도 하고 놀이판을 만들어 놨더니, 사람들이 모여들더라고요. 자신의 모습이, 이웃이 사진 영상으로 표현됐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분들이 흥분하고 신기해하더군요. 저도 그 모습을 보면서 사진이 정말 큰 의미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과 흥분이 있었습니다."
전시회가 갖는 시·공간적 한계와 아쉬움은 책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구멍가게가 생기기 전에는? (2000. 실천문학)』과 『그리운 장날(2001. 눈빛)』이라는 사진집을 각각 안도현·김용택 시인과 함께 펴냈다. 글은 사진을 풍부하게 했고, 사진은 글을 한층 빛나게 했다.
『그리운 장날』작가의 말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 순창 동계장의 한 할아버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 이 선생, 담배 한 대도 마음이 없으면 안 권하는 것이여!' 그 마음을 렌즈에 붙잡아 두려고 나는 오늘도 장터로 간다. -
그의 장터 사진은 풍부한 표현이 어리지도 않고, 비장한 감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 사이의 진솔함과 애틋함이 잠시 접어 두었던 추억의 한 귀퉁이에 아무렇지 않게 강물처럼 흐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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