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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 | 인터뷰 [문화저널]
강낙승의 세상살이
마음 비우는 일로 살아온 70여생
김은정 문화저널 편집위원(2003-09-08 09:48:14)

때로 많은 사람들의 하고많은 일 중에서 '이 사람은 오직 이 일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짧지 않은 세월을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일이 늘상 즐겁고 보람스러워 지칠 겨를이 없는 이들에게 그것이 비록 지난한 세월이었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의미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향제줄풍류의 가야금 명인 청파(靑坡) 강낙승(姜洛昇·74·이리시 모현동 1가 257)선생은 자신의 대부분 생을 우리음악을 가구는 일로 지켜오고 있지만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의 청청한 율객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이었다면 돈버는 일이라 했더라도 이제껏 해 오진 못했을 겁니다. 가끔씩 내 삶을 뒤돌아볼 때면 '허,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참말일 게다. 그렇게 순탄치는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는 국악이 선생에겐 삶의 희망이자 보루였을 게다. 대쪽같이 꼿꼿한 몸가짐에 넉넉한 기쁨으로 흐트러져있는(?)얼굴의 잔주름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렇다해도 국악을 지켜온 선생인데 어찌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없을까. 그러나 선생의 한은 이제 그가 타내려 가는 가야금 선율에 실려 억 겹의 감동으로 승화되고 있으니 그는 생애와 사상 모두를 자신의 음악을 위해 쏟아 넣고 있는 셈이다.
청파는 1916년 2월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한학자인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깨친 그는 어릴 적부터 우리가락에 유난한 관심을 가졌었다.
그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있다.
"열한 살 땐가 보통학교 증축 낙성식에 구경 가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농악대 가락이 그렇게 흥겹고 멋질 수가 없습니다. 두루마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장단을 맞추어보는데 마음처럼 잡혀지질 않았어요. 학교에 도착하기 전가지 해낼 양으로 몇 번이고 멈춰서면서 기어이 장단을 맞춰냈었지요" 그때의 고집을 생각하며 그는 혼자 웃곤 한다. 청파는 자신이 국악에 <끼>가 있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가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열아홉 살 나던 해 그는 여섯 살 아래인 최영순 씨와 부부 연을 맺은 이후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지내다가 우연히 공직생활에 들게 됐다. 일제강점기에 청년기를 맞은 그는 당시 급격히 변하는 사회 속에서 새로운 관청이 들어서고 제도가 새롭게 시행되기 시작했던 당시, 경찰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이때가 스물네 살 되던 해였는데, 그는 내심 어릴 적부터 꼭 배우리라 던 국악도 이젠 부질없는 일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 공직생활 덕분에 그는 참말 영영 국악의 길을 걷게 됐던 것이다.
일제치하의 순사라는 것이 그의 말대로라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고향으로 첫 발령을 받았던 선생은 '고향에서 수사 짓은 더욱 힘들어' 위에 요청해서 남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의 첫 근무지나 다름없는 남원 경찰서는 오늘의 강낙승이 있게 하는 바로 그 시작이 되었다.
"우연이었어요. 근무차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담장을 넘어오는 여인네들의 시조소리가 마음을 후비며 파고듭디다. 그곳이 예기조합인 권번이었는데, 그 길로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고, 북도 가야금도 어깨너머로 익혔지요," 국악의 고장인 남원에서의 직장생활이 선생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안겨준 셈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자신이 적성에도 별스럽게 맞지 않는 경찰직을 택한 것도 그에게 이미 주어져 있던 운명이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선생은 하루도 빠짐없이 권번엘 나갔고, 한 악기를 붙잡으면 몇 시간이고 몰아붙였다. 당시 그는 시조를 읊으면서, 가야금 줄을 뜯으면서 생활의 의미를 찾았었고 그 시간이 자신의 가장 큰 낙이자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말살시키려했던 일제의 악랄한 정책의 핍박을 받는 시대상속에서 그나마 순사노릇(?)하며 녹을 받고 있던 선생으로서는 그 큰 갈등과 어려움을 시조로, 북채로, 가야금으로 삭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파고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원의 권번에선 대강면 사람이던 장봉호씨에게서 시조를 배웠고, 그와 각별하게 지냈던 기생으로부터 잔영산에 군악까지, 이를테면 풍류초벌을 떼었다. 그리고 해방되던 해 부안 경찰서로 전근을 간 그는 그곳에서 인간문화재 41호인 정경태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시조수업을 받았고 가곡과 가사가지 새롭게 전수했다. 스승과 제자로서 연을 맺은 정경태선생과는 풍류객으로써 두터운 교분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으며, 금사(琴史) 김용근(金容根)선생으로부터 함께 거문고를 배운 동문인 이유로 친구로써의 두터운 정도 더불어 안고 있다.
청파의 본격적인 가야금 공부는 그의 두 번째 고향이 되어버린 이리로 직장을 옮기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당시 경찰서에서 이리시청으로 아예 직업을 바꾸어 버렸을 대였는데 가야금 명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진양수(陳良洙·작고)선생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본영산에서 굿거리까지를 익혔고 그 후에도 5·6년 동안 진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국악의 다른 부분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황상규로부터 거문고를, 채규환에게선 양금을, 박홍규로부터는 장고를, 그리고 단소까지 전바탕을 내리 익히면서 향제줄풍류의 정통계보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스물다섯의 늦은 나이로 국악에 입문한 그는 우리 가락에 대한 열정을 지칠 줄 모르는 연습으로 담아내면서 불과 10여년 만에 풍류에 두루 능한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타고난 기질에 각 악기를 익히는데 한눈팔지 않고 몰두했던 노력가지 더해져 명인에 이르는 길을 탄탄하게 닦아내던 선생이 얼마나 지독하게 연습시간을 가졌었는지는 그의 소중한 기억에서도 드러난다.
"젊었을 때부터 안사람이 몸이 약했어요. 자리에 눕는 일이 자연 많아졌는데, 그 사람은 당초부터 내가 국악에 미쳐있는 것을 달가워하질 않았지요. 몸이 아프고 그러면 신경도 예민해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가야금을 켜면 많이 짜증스러워했어요. 그래도 가야금 연습은 해야겠고...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불이나 수건으로 덮어놓고 줄을 뜯곤 했는데 그런 내가 아내는 꽤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지독하리만큼 악기를 익히는 데 몰두했던 그는 스승인 진양수선생으로부터 오해를 받아 난처한 입장에 빠지기도 했다. 가야금을 배울 때였는데 풍류 한바탕을 2주일 정도 걸려 다 익혀버리자 진선생은 벼락같이 화를 냈다. 이미 다른 데서 배우고 와서는 그걸 속이고 처음 배우는 양 나섰다는 것이었다. 그는 선생의 꾸중이 다 끝났을 때야 그간의 과정을 말씀드리고 본격적인 가야금수업은 처음이라고 밝히자 진선생은 그의 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감탄하면서 그제서야 오해를 풀었다.
선생의 솜씨가 돋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정읍의 초산율계에 드나들면서 풍류에서부터 가곡, 가사, 시조에 두루 능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내곤 했다.
'한 달에 한번 모이는 율계에서 밤새워 닦은 솜씨를 발휘하며 풍류객들과 더불어 율음을 감상하는 시간은 참말 무아지경에 이를 정도로 흥에 취할 수 있었다고'그는 말했다.
청파는 이리에도 율림계를 조직, 풍류모임의 맥을 잇는 바탕을 마련했고 10년쯤 그렇게 활동하다가 58년에 이리시우회를 발족, 정악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미 풍류가 생의 의미가 되어버린 그는 마흔 다섯 이른 나이에 20여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국악인으로서의 삶을 꾸리고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맹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형편이 풍족한 것도 아닌데 가정을 꾸려나가는 가장이 직장을 별스런 갈등 없이 그만둘 수 있었다는 것은... 허허, 그러나 안사람이야 얼마나 못마땅했겠어요. 내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지요."
국악에 대한 맹목적 열정을 반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은 지금도 크다는 선생은 직장에 충실하지 못해 말단직으로 전전해야했던 아비 덕분에 아이들의 원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것이 이 길로 들어선 때문에 안아야했던 가장 큰 안타까움이었다고 말했다.
선생은 덕분에(?) 슬하의 4남2녀 중 자기 욕심대로 국악의 길을 물려줄 자식을 택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다섯째 아들 석정이 음악에 소질이 있어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나섰음에도 그 뜻을 물리친 것이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여섯 자식중 하나라도 대를 이어주기를 갈망했던 그의 바람은 막내아들인 기석(奇錫)이 풀어주고 있다. 자식들 중 유일하게 대학공부를 마친 (전북대 사대) 기석은 무풍고 교사로 재직 중인데 악기에 유난한 관심을 보여 양금 전수를 시작, 지금은 영남대 교수인 최무진씨, 이리에 사는 이정호씨와 함께 그의 몇 안 되는 이수자가 되었다.
선생은 68년 이리정악원을 창립했다. 직접 원장을 맡아 오늘가지 이어온 이리정악원은 향제줄풍류의 보고가 되었는데 이미20년여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이리정악원에 거문고의 황상규와 가야금의 김규원 등 5·6명 향제줄풍류 이수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가끔씩 향제줄풍류 단소기능보유자인 김무규선생도 자리를 함께 한다.
선생은 87년 전주에 도립국악원이 문을 열면서 가야금교수로 나가고 있다. 아침 8시면 집을 나서 저녁 7시 퇴근할 때까지 그는 참으로 열심히 도립국악원 원생들을 가르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가지 이리에서 전주까지 꼬박꼬박 출퇴근해야하는 생활이 고되긴 하지만 이즈음처럼 보람 있고 즐거운 날들에 감사해 한다.
73년에 남창가곡 26곡 전곡발표회를, 75년엔 현존 12가사를 모두 발표, 국악계의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던 청파는 그 공으로 76년 도문화상을 받았으며 85년 9월엔 중요무형문화재 83호로 지정 받았다. 향제줄풍류 가야금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기까지 꼭 50년 세월이 걸린 것이다. 외고집으로 그가 이어온 향제(鄕制)줄풍류는 지방에서 전승돼온 현악영산회상의 별칭이다. 향제줄풍류는 경제(京制)줄풍류와 악기편성에 있어 같지만 연주법과 악곡편성이 조금씩 다르다. 줄풍류는 합주곡이어서 합주를 할 수 있도록 악기와 악사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야 비로소 '풍류의 한 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파의 이즈음 낙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도립국악원에 찾아오는 그의 제자들은 국민학교 코흘리개서부터 주부까지 다양하다. 그는 이들을 가르치면서 '70여년 생을 헛되이 살진 않았구나'하는 위안도 받는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진지하거나 묵직한 것을 싫어하고 변화무상하고 쌈빡한 것을 즐기지요. 그래 가르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는 고풍스런 풍류를 지속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틈틈이 민요가락을 끼워 넣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침체위기에 빠져있던 풍류를 익히겠다는 일부 젊은 층들이 그를 찾을 때 청파는 희망을 갖는다.
"樂을 하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해요. 바른 마음을 가져야지요. 그런데 제자들에게 이 바탕을 가르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요. 아무리 기능이 훌륭하다해도 바른 마음이 따라주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 신명을 불어넣을 수 없는데 모두들 기교만 익히려 들거든요."
여섯 남매 모두 분가시키고 내외만 단촐하게 살고 있는 그는 자신이 남은 생 동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자주 생각한다. '좋은 제자 두는 일'을 가장 큰 바람으로 안고 있는 그는 제자들에게 바른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선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일이 우선해야한다는 생각도 한다.
매주 일요일 집에서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리 정악원에 나가는 청파는 집을 나서는 길, 자신의 세상살이를 뒤돌아보며 한평생 가슴속에 깊이 안아온 풍류가락을 어떻게 두고 갈 것인가고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며 골 깊은 주름위로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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