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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3 | 인터뷰 [문화저널]
작가를 찾아서원형의 언어로 담아낸 삶의 정서화가 박종수
김은정 문화저널 편집위원(2003-09-08 11:34:09)

도시 한공간, 시멘트 2층 건물의 구석진 작업실에서 만난 "땅"은 <너희가 잃어가고 있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을 알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그래, 우리가 서있는 이따가는 어디인가? 우리는 이 땅이 안겨주는 의미를 알고 있는가.
화가 박종수의 작업실을 찾았던 날은 봄을 앞세운 가랑비가 느적느적 내리는 늦은 오후였다. 그의 작업실은 처음이 아닌데도 최근에 그려낸 커다란 화폭들로 또다시 <너는 이런 땅의 의미를 아느냐>고 자꾸만 묻는 것 같은 새로운 분위기다. 사실, 화가와의 긴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다. 아니, 그의 그림들은 그것을 그려낸 작가의 너저분한(?) 이야기들을 거부하고 있다. 예외 없이 화가자신도 " 할 얘기가 뭐 있겠어요? 새삼스럽게"라는 말로 의례적인 몇 가지 질문마저도 아주 쉽게 막아버렸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글은 쓰는 사람의 철저한 주관에 의한 것이 되고 말았다.

땅과 흙을 사랑하는 작가
화가 박종수는 땅을, 흙을 사랑하는 작가다. 그는 참으로 많은 그림들을 20년여 동안 지치지 않고 그려 왔는데 그의 주된 소재였던 <풍경>이나 <정물>(초기의 작품들에선 정물이 비교적 많이 등장한다). <장생> <엉겅퀴> <할머니> 등등 대부분의 것들이 땅과 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근래 들어 아예 땅에 자신의 주된 관심을 함몰시켜 놓고 말았다.80년대 중반이후 그가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다가선 <땅>은 그의 새로운 창작세계를 지펴가는 단단한 바탕이다. 그의 땅을 주제로 한 최근 작품들은 자주 <박종수의 그림이 너무 갑작스럽게 변하고 있다>는, 격려보다는 질책의 의미가 더 강한 평을 받아내는 대상이 되곤 하는데 그가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지녀왔던 지적관심이 어떻게 표출되어 왔는가를 눈여겨본 사람들은 그러한 평가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금세 알 수 있다.

민화의 원색적 감각이 더해진 한국적 정서
전북 고창출신으로 조선대 미술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그림에 대한 눈을 조금씩 떠가던 대학시절부터 당시 대부분의 친구들이 지니고 있었던 풍경화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는 불상이나 민화 등에서 따온 소재를 바탕으로 우리 색채를 찾아내는데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70년대까지도 강렬한 상징적 의미로 화폭 속에서 호흡하고 있었다.
때문에 79년 전주 전북예술회관에서 가진 전시회에서 선보인 <풍어기>나 <고향> <외로운 노래>
<香> 등 일련의 작품들은 그들이 지닌 소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불교적이고 민속적인 색채가 짙게 풍긴다. 이후의 83년, 84년, 86년에 가진 전시회에선 이러한 특징이 보다 더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동안 그는 <장생-長生>을 주된 주제로 등장시키면서 민화의 독특한 요소를 현대적 감각으로 실어내는 시도를 작업의 중심에 놓았다. 소나무를 주로 다룬 계열의 <장생>은 표현주의의 기법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에 민화의 원색적 감각이 덧붙여져 한국적인 한의 정서를 깊이 있게 쏟아놓고 있는데 그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상징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서정적 이미지를 친근감 있게 전해주는 성과를 함께 얻어내고 있다. 이 동안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들꽃>연작이다. 양분법적인 과감한 구도의 시도,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땅위에 꿋꿋한 생명력으로 차오르는 들꽃(그것은 엉겅퀴나 민들레를 연상케 한다)은 한국적인 정서, 이를테면 한과 의지의 극복을 보여주는 이민족의 암울한 역사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갈구하는 세계가 동시에 응집되있다. 이와 함께 다루어진 작품이 <땅>연작이다. 이때의 <땅>은 기계문명사회가 이루어낸 최신식 도로와 주변의 황폐한 대조적 분위기의 땅을 대입시킴으로써 땅의 역사를 민족과 시대의 역사로 이미지화하는 효과를 드러내주고 있다. 그가 표현하고자한 황폐한 땅의 굴곡들은 참혹한 우리 역사의 그늘을 내밀하게 상징한 것이다.

민족사에 대한 관심으로 뿌리내린 작가정신
화가 박종수의 작업을 관심 있게 지켜봐온 문학평론가 이보영은 그의 작품에 대해 '땅계역의 연작은 얼핏 보아서 사실적인 기법이 돋보이지만, 자세히 음미한다면 객관적 사실성(혹은 풍경성)을 넘어선 귀기(鬼氣)에 가까운 상징적 호소력과 박력을 보여준다. 특히 대조적 기법으로 소리 없는 충격을 주는 <땅>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경사진 지평선은 풍경의 말세적(末世的) 분위기를 미묘하게 강조하고 있다. 6·25의 慘禍같은 것을 연상케 하는 이 계열의 작품들은 그 이면에 내포된 작가의 민족사에 대한 관심을 엿보게 한다'고 평한바 있다. 그가 말했던 민족사에 대한 관심은 화가의 더욱 극명한 작가정신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그 이후 이어지는 <땅> 연작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언어와 표현방법으로 담아내지고 있다. 이 작품들은 극 첫개인전에서 민화적 모티브를 활용했다는 것만으로도 가능했던 신선한 충격을 또다시 불어넣어주는 계기가 되고 있는데 그 스스로는 당시의 신선함이 어떻게 담아내느냐는 방법론상의 시도에 의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충격은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하는, 보다 본질적이고 내적인 작가적 고뇌를 담은 것이기에 그 위상을 달리한다고 말한다.
실지로 그는 첫개인전이후 꽤 오랫동안 감각적이고 상징적 이미지에 바탕을 둔 표현주의적 기법의 작업에 스스로 매료되어 헤어나지 못했었던 것에 비추어 근래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지독한 자기 작업에의 성찰과 확인하는 과정이 더해져야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표현주의 기법, 이를테면 어떻게 그려야할 것인가에 지나치게 집착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한국인의 정서가 단지 전통적 이미지와 그에 대한 향수를 회복시켜내는 것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작품에의 변모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화가의 말처럼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집착적인 작업을 꾸려왔던 그는 삶을 열린 눈으로 바라보고 이 시대의 문제, 우리의 현실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면서 그림은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보편적인 사실에 비로소 눈을 뜬 셈이다.

농촌현실에 눈 돌리고 난 후의 연작들
그는 89년 봄 다섯 번째 작품전을 전주 온다라미술관 초대전으로 가지면서 자신의 작업이 추구해 나가야할 방향을 뚜렷이 제시받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화가로서, 이 시대와 이 땅에서 해내고자 하는 자기 몫을 찾아낸 것의 다름 아니다. 80년대 동안 줄곧 이어온 <땅>연작과 <할머니> 연작을 새롭게 내놓은 그는 진정한 한국적 원형으로서의 정서와 맞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전시회에서 보여주었다. 민족적 삶의 질곡, 수난의 역사를 반영하는 <땅>과 <할머니>는 그가 갈망하는 한국적 정서로 대표되는 생명력이다.
그가 최근 농촌의 현실에 눈을 돌리고 난 이후에 낸 <땅>이나 <할머니> 연작은 더욱 새롭다. 그 <땅>은 예전의 기계문명사회에서 빚어낸 이기적인 산물에 대조되는 땅과는 또 다른 문제의식을 도출해내고 있다. 그것은 민중의 생명력이나 민족적 삶으로써의 본질적인 의미로 존재한다. <할머니>연작 역시 <땅>과 같은 연상에서의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 <할머니>는 최근 농부들의 건강한 얼굴, 삶에 지친 얼굴로 대신 되고 있기도 한데 이는 그가 <들·바람·사람들>과 공동작업으로 꾸리고 나선 농촌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다듬고난데서 비롯된 내용들이다.
<풍경>과 <정물>부터 <장생>을 거쳐 <땅>과 <농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세계의 변모를 읽으면서 이 시대의 화가들이 추구해야할 가장 보편적인 정서는 무엇인가고 생각해 보았다.

소외된 인간성이 절실한 시대적 문제의식
그의 작업실, 창작의 결실들이 즐비한 벽면에 새롭게 눈을 끄는 작품이 있다. <문명의 굴레>라 이름 지워진 그것은 콜라주기법에 의한 대형작품인데 향락과 사치풍조, 퇴폐문화의 산물들이 어지럽게 짜집기된 그 속에서 소외된 인간성이 절실한 시대적 문제의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근작인가 보죠?" "별계획없이 해본 작품이예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땐 절망으로 와 닿는 청소년 문제에 부딪치면서 안게 되는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방관하는 세대로써 갖게 되는 자책감이랄까요?'그는 헐겁게(?) 웃었다. 바로 그 옆 슬프면서도 강인한 의지를 검게 그을린 얼굴로 담아내고 있는 농부가 실린 화폭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던 화가가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나는 농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들의 삶을, 정서를 제대로 담아낼 수가 있겠어요? 표피적으로 읽어내는 단순한 차원 그 이상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미술이 꼭 이런 것이어야 할까요? 혹 내 그림이 80년대의 사회상황 속에서 의도적으로 짜 맞춰진 그런 것은 아닌지 갈등이 생겨요. 민중미술로 대별되는 미술만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인지, 내 스스로에게 배반감 같은 것도 느끼구요"

민족적 정서를 올곧게 담는 화가로써 바로서게 될
80년대를 지켜오는 동안 자기를 되돌아보기에 성급했던(?) 화가는 이제 진정 자신이 서야할 자리를 확실히 찾기 위한 시험에 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적 원형을 표출해 내는 방법과 소재주의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느냐는 치열한 고뇌가 <땅>이나 <할머니> 연작을 얻어낸 것처럼 이 시험은 머잖아 화가 박종수의 작가의식을 성실하고 뚜렷하게 세우게 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진정한 민족정서를 올곧게 담는 화가로써 서있게 될 것이다. 가장 소박하면서도 민중적인 정서를 응집하고 있는 그의 <들꽃>처럼…
화가 박종수는 지난 3월 서울 신도림중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고향을 오랫동안 떠나있어야 한다는 상실감으로 고민하던 그는 낯선 서울생활이 어쩌면 자신의 작품세계를 더욱 튼실하게 구축해 줄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의욕을 새롭게 꾸려야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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