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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 | 인터뷰 [꿈꾸는 청춘]
“정착은 떠나기 위한 준비입니다”
중국세계문화유산 가이드북 펴낸 정지현씨
임주아 기자(2013-04-05 11:58:01)

정지현(33)씨는 일년에 한두번은 배낭을 싸메고 해외로 나간다. 돈이 많거나 시간이 남아서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그가 선택한 인생의 목표를 위해 돈을 모으고, 시간을 쪼개서 나간다. 그의 목표는 천여개에 달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모두 돌아보고 가이드북을 펴내는 것이다. 국가나 기관에서나 할만한 일, 개인이라면 일생을 다 바쳐도 쉽지 않아 보이는 일이다.

프로 여행자 되기
정지현씨는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을 위해 인생을 재조직했다. 전공을 버리고, 창업을 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드디어 첫 번째 성과물이 나왔다. ‘세계문화유산 가이드북 중국편’을 펴낸 것이다. 커다란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는 여행만큼이나 설레었다. 가출메모를 남기고 나갔다가 터미널에서 싱겁게 붙잡힌 국민학교 2학년. 2년 뒤 그는 배짱을 더 키워 가족 몰래 전주에서 김제까지 7시간을 걸어 어머니가 일하는 학교에 깜짝 방문을 했다.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어머니에게 혼쭐이 난 후로 잠잠해졌다 싶었던 방랑벽은 고등학교 2학년때 다시 도졌다.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가르치던 조선족 교사의 권유로 여행을 결심한 그는 주소와 배낭만 달랑 들고 상해로 떠났다.상해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초보여행자를 노리는 바가지꾼들. 보름간의 여행은 사기로 시작해 사기로 끝났다. 사기도 사기지만 변변한 가이드북 하나 없을 때라 더욱 힘들었던 여행. 정확한 정보가 곧 시간과 돈인 배낭여행가들에게는 알찬 가이드북 한권이 절실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이후 방학마다 돈을 모아 중국을 여행하던 지현씨는 언젠가는 배낭여행자들을 위한가이드북을 써보리라 다짐했다고 했다.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장학금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쳇바퀴처럼 도는일상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열심히 안 해서 이런 생각이 드나보다’ 싶어 대학원 입학까지 덜컥결정했지만 방락벽 체질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대학원 입학 며칠 전 떠난 여행에서홍콩야경을 보는데 느낌이 이상했어요. 말로 할수 없는 무언가가 내 머리를 딱딱 치는 기분이었죠. 그 때 알았어요. 제 길은 바로 여행에 있다는 걸요.”어떤 여행을 할 것인가, 아직 막연했던 시기. 그는 자금마련과 여행준비를 위해 비자를 받아 호주로 떠났다. ‘3년 정도 세계일주를 해야겠다’마음먹은 그는 도서관을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하다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알게 됐다. 당시 860개에 달하던 세계문화유산을 돌아보는 것을 목표로 정한 그는 자연히 가이드북을 찾아보게 됐고 세계문화유산 전체를 돌아보고 쓴 가이드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내가 해볼까?’

햇병아리 부부, 첫번째 가이드북을 만들다
말보다 행동이 빠른 지현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가이드북을 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지역 하나가 통째로 세계문화유산인 곳도 있어 포인트만 찍어 조사하는 것도 불가능. 첫 답사 이후 새로 등재된 유산들이 많아 틈틈이 보충답사를 해야만 했던 것도 벅찬 일이지만 내손으로 가이드북을 낸다고 생각하니 최선을 다할수록 보람이었다. 그의 배필인 정소윤(33)씨를 만난 것도 그 때쯤. 여행경비를 모으려고 몇 달간 일했던 마트에서 운명적으로 아내를 만났다. 무턱대고 예비 장인어른을 찾아가 여행 허락을 받았다. “어떻게 여행하고 무얼 얻어올 건지 아버님 앞에서 면접같은 강의를 했어요. 아버님이 개방적인 성격이셔서 결국엔 승낙해주셨죠. 믿어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렇게 떠난 첫 번째 답사. 두 사람은 6개월간 함께 한·중·일 3국의 66개 세계문화유산을 배낭여행으로 돌아봤다. “아내는 첫 배낭여행이었는데도 불구하고 20kg 배낭을 메고도 잘 버텨줬어요. 저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여행 체질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늘 함께 여행할 생각이에요.” 그냥 여행과는 달라 마냥 즐기지 못하고 악착같이 정보를 찾아야 했던 답사여행. 그 고된 여정을 함께 이겨낸 두 사람은 한국에 돌아와 식을 올렸다.

스물아홉에 만드는 책
답사를 마친 지현씨는 가이드북 집필을 시작해 6개월 만에 원고를 완성했다. 하지만 출판은 녹록치 않았다. 여행출판사와 접촉해 계약 목전까지 왔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부딪쳤다. 저자보다 서점이 더 이윤을 가져가는 출판유통시장 상황도 햇병아리 저자인 지현씨에겐 암담한 현실이었다. 결국 그는 1인 출판을 하기로 마음먹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창업을 택했다. 지현씨가 생각해낸 창업아이템은 ‘파이’. 호주배낭여행 때 파이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운 고기파이를 전주에서 만들어 팔면 좋겠다 싶었다. 그날 이후 학원에서 제과제빵을 익히고,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을 배웠다. 어머니는 “나이 스물아홉에 아르바이트냐”며 성화를 내셨지만 지현씨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모든 메뉴를 맛보고 버리기를 수십 번, 싸고 넓은곳을 얻으려 발품 팔길 두 달여. 우여곡절 끝에 가게를 얻었지만 고생길은 끝나지 않았다. 부부는 첫 1년동안 1평짜리 쪽방에 먹고 자며 가게를 안정시키는 데 전념해야했다. 부부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여행의 경험이었단다. “함께 배낭여행을 하며 별의별 고생을 겪어서인지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3년째 접어드니 이제 좀 흑자를 본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 반갑다.

세계문화유산 가이드북? ‘진스트래블!’
자금을 모았으니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할 차례.“난생처음 편집디자인을 배우고, 백번도 더 넘게 원고를 보며 교정을 봤죠. 처음이라 어설프고 디자인면에서도 많이 부족했지만 완성된 책을 받아드는 순간 피가 솟는 것을 느꼈어요.”그가 쓴 중국 세계문화유산 가이드북에는 초보배낭여행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 중국에 있는 40개에 가까운 세계문화유산이 꼼꼼히 담겼고 통편과 추천 숙박업소, 입장료와 관람가능 시간, 관련기관의 연락처와 관람팁까지 상세히 옮겼다. 하지만 책은 어느 서점에 가도 없다. 팔리지 않아도 직거래만 하겠다는 지현씨는 그의 가게와 자체 온라인쇼핑몰에서만 판매를 한다. 홍보도 안 되고 판로도 없어 힘든 걸 알지만 그의 1인 출판사를 브랜드화 시키고 싶어서다. ‘진스트래블’하면 세계문화유산책 쓰는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지금의 성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창업과 1인 출판을 통해 지역 젊은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도 그에게는 큰 의미다. “외국에 있으면 애국심이 생기고 한국에 있으면 애향심이 생긴다”는 그는 불편하더라도 지역에서 뭔가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이런 다양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지역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게 인테리어도 스물 아홉 청년에게 맡기고 책 인쇄도 서른 살 또래에게 맡겼다. 이렇게 서로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다보면 자신도 동료도 세상도 조금 더 나아질 거라 믿는다.

떠날 준비를 위해 ‘준비’하는 자
지현씨는 요즘 가게를 운영하며 틈틈이 여행가이드북을 쓰고 가이드를 다닌다. 여행가이드는 십년 전부터 해왔지만 정식으로 돈을 받은 지는 석 달 정도 됐다. 네명 이상 모인 신청자들이 지현씨의 경비와 가이드비를 1/n로 나눠 내는 식이다. 올해에만 네 번이나 중국에 다녀왔다는 그는 가이드북 업데이트 차원에서도 일년에 두세 번은 꼭 중국에 간다고 한다. 요즘은 전주에서 게스트하우스 형태의 숙소를 만들어보고 싶어 중국에 나가면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앞으로요? 계속 해야죠. 3개월마다 한 번씩 배낭 묶고 푸는 게 제 일이니까요.” 전세계 문화유산 배낭여행 가이드북을 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인 지현씨. 사실 더 큰 꿈은 어느 나라에 있든 클릭 한번으로 숙박이면 숙박, 음식점이면 음식점, 관광지 등 한번에 예약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꾸준히 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그의 의지와 뚝심은 스스로 떠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즐기는 자는 떠날 준비를 위해 ‘준비’하는 자가 아닐까. 배낭 매기 위해 정착하는 그의 삶처럼, 오늘 하루도 모두 그 과정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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