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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시간을 담고 기억을 들추다
사진작가 김지연
이세영 편집팀장(2013-05-02 16:01:01)

잔뜩 녹슨 사각의 건물이 사진 속에 홀로 서있다. 별다른 특색없이 사진을 가득 채운 방앗간은 평범하고 밋밋하게 보인다. 그의 사진 속에 담겨진 방앗간은 그러나, 빛바랜 기억을 더듬게 하고 마을의 분위기를 상상케 하는 아련함이 있다. 그를 만난 날, 계남정미소 공동체박물관의 기억 아카이브를 모은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눈빛, 2013)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10여년, 그의 작업을 한데 모은 이 책을 뒤적이며 늦깎이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지연에게 ‘하필 방앗간을 골랐냐’는 질문을 던졌다.

사진이 가져야할 덕목에 충실한 사진찍기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정미소는 독특한 구조의 건물에 마을의 입구를 점유하고 있다. 농지, 토지, 쌀이라는 심각하고 미묘한 느낌을 정미소에서 받았다. “그 때는 쌀이 귀했던 시절이었잖아요. 쌀이 철철 쏟아져 나온다는 경이로움, 누구 집은 어땠다더라 하는 마을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함께 쏟아지던 곳이었어요.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봤던, 먹을 것을 만들어 내는 곳이면서 이야기들이 생산되는, 어쩌면 공동체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정미소의 기억들을 담아 두고 싶었어요.” 정미소에 대한 그의 추억은,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이 시대의 속도와 충돌했다. 쉰의 나이에도 정미소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먹는 것이 사라질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공간이 점차 쇠락해가고, 사라져가고 있었다. 기억을 잡아두고 싶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무렵, 녹슬고 허물어져가는 방앗간을 찾아 사진에 고정시켰다. 전라도를 비롯해 경기, 강원, 충청, 전국을 돌며 500여 곳의 방앗간을 찾아냈다.“사람들이 너무 비슷한 사진을 찍으면 지루하지 않느냐고 물어요. 하지만 저는 지루하지 않았어요. 그 동네에 가면 동네의 뒷산을 보고 앞에 있는 길을 보며 이 길은 무엇이 지나갔을까를 상상해요. 역사성이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정미소 이야기며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 전혀 지루할 틈이 없어요.”그래서 그는 정미소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정미소가 가지는 역사와 공간을 다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프레임을 고민한다. 아무런 정보 없이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정미소라 할지라도, 그에게 정미소는 이야기가 담긴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보였다. 2년여 정미소를 사진에 담아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년 반 배우고 2년 사진을 찍고 연 사진전이었다.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에게 사진을 가르쳐 준 작가도 “이게 무슨 사진이냐, 왜 이런 사진을 찍느냐”는 비난을 했다. 심란한 과정을 거쳐 무모하게 사진집을 냈지만 사람들은 주목해 주지 않았다. 무명의 사진작가에게, 그것도 정규 사진교육을 받지 않은 나이 많은 여성 작가에게 돌아오는 냉담한 시선이었다. “제 사진에 대한 혹평에 조바심을 느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저는 그러기보다 배짱있게 제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혹평을 하는 분들이 있으면 뒤돌아서 ‘나도 저분 작품 좋아하지 않는다’고 무시했어요.” 확신은 없었지만 기억을 붙잡는 일을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다. 거창하게 완벽한 사진이 아니라 사진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덕목, 시간성과 공간성을 가진 사진을 찍고자 했다.

사진계의 불가사의가 된 늦깍이 사진가
그러던 그가 ‘정미소’에 확신을 가졌던 것은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 <다큐먼트(Document)>전과 2005년 『나는 이발소에 간다』 발표 후였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기록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또는 그러한 형식을 사용하는 일련의 사진작업들의 기원을 살피는 데” 목적을 뒀던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를 통해 그는 그의 사진의 가능성을 봤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그 방앗간들을 찾았다. 2000년 무렵 정미소 사진작업을 할 때 열 곳 중 한두 곳은 일 년 내내 문을 열었고, 서너 곳은 가을에만 운영했었지만 10년 사이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2010년을 전후해서 그나마 어렵사리 운영되던 방앗간도 진안 운천리 정미소를 제외하고는 운영하는 곳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번듯하게 새 건물이 들어선 곳도 있고, 헐리고 빈 땅만 있는 곳이 있는가하면, 허무는 것도 귀찮은 듯 폐허로 남은 정미소도 있었다. 지난달 류가헌에서 열린 <정미소, 그리고 10년>사진전은 그, 그리고 그의 작업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리가 됐다. 개막식에 모인 30여명의 사진가들과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는 ‘4.16사진선언’을 했다. 그들은 선언문을 통해 “몇몇 사진가들만의 살롱이 되어 장기 침체의 늪을 걸어왔으며, 젊고 유능한 사진가들의 출입마저 제한해 버린 지 오래”된 한국사진계를 향해 일침을 가하고 한국사진의 구조적 부조리와 불합리, 교조적·전제적 억압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삶의 흔적 그리고 그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대한 치열한 자각을 위한 혁명임을 표명했다. 그의 전시장에서, 그의 작업 방식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어디 기쁘기만 했으랴, 선언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인정받아야 하는 슬픔 또한 밀려왔을 테다. “아름답다고 예술성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 예술성이라면 저하고 예술성은 상관없어요. 사진을 찍으며 예술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찍을 수는 없어요. 다만, 그것이 예술성이냐 아니냐를 논하기 전에 사진에는 시간과 공간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확고한 철학입니다.” 사진에 예술성이 있느냐하는 논쟁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저 그는 사진에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주장하려고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기록성’을 미덕으로 하는 사진에 가장 근접한 것이 그의 작업은 아닐까, 그의 말은 사진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쉰의 나이로 사진에 입문한 지방작가가 10년이라는 빠른 시간에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래서 그는 사진계에서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그의 말을 빌면 “인정을 해주고 싶지 않은데 작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지만 그가 사진기를 들게 된 것은 딱히 이유가 없었다. 서울 예전에서 연극을 한 깜냥으로 미술을 하려는 꿈을 꾸었던 기억으로 우연히 듣게 된 무료 사진 강좌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주부로 살면서도 예술적 갈망은 끝없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사조가 생겨나는 것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끊임없는 용틀임과 좌절속에서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 사진에 머무르게 된 거겠죠.” 무료 강좌는 사진에 대한 의혹을 더 심어줬다. “사진이 나타낼 수 있는 뭔가가 더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서울에서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틔워준 사람을 만났다. 이경민 사진아카이브연구소 대표였다. 그는 사진이 너무 예술성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누구 것인지도 모를 사진들에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는 것 같다, 좀 다른 사진을 찍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이 그럴듯했다.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을 했고, 사진에 있어서 시간성과 공간성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일단 기록을 하고 정리는 나중에 해보자는 생각으로 정미소를 찍기 시작했다.

‘관계’를 만들려는 의지로 탄생하는 공간들
정미소 작업은 그에게 또 하나의 직책을 만들어줬다. 계남정미소 공동체박물관 관장됐던 것이다. 정미소를 미친 듯 찍고 다니던 2002년 “정미소가 잘 없어지니까, 정미소 하나를 마련해서 내 작품이라도 걸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미소를 사들일 결심을 했다. 3년간 정미소를 찾아다녔지만 상황이 여의치는 않았다. 그만두자는 생각을 할 때 쯤, 우연히 계남정미소가 눈에 띄었다. 뚝딱 뚝딱 몇 군데를 고쳐 박물관을 열었다. 그는 계남정미소를 통해 진안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사진, 가계부, 졸업앨범… 사라지는 자료들은 주제별로 모아 전시를 했다. 근대유물을 전시하는 것을 보는 것이 드문 시절이었고, 아카이브에 대한 개념도 자리 잡지 못한 때였지만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만 했다. 특히 전문가들의 평가가 높았다. 근대유물 전시의 계기가 되었다는 자부심도 컸다. 계남정미소는 전국에 회자되며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계남정미소에 오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이 가진 정미소의 기억들을 풀어내고 돌아갔다. 계남정미소가 정미소의 기억을 과거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6년간 어려운 재정 속에서도 계남정미소를 끌어왔던 이유였다. 하지만 지난해 9월 계남정미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계남정미소 게시판은 “다음에 또 올게요”라는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진안의 삶을 기록해 내던 계남정미소를 문 닫아야 하는 아쉬움이 커요. 살려놓고 싶은데 살리는 방법들이 쉽지 않은 상황이네요. 혼자서 꾸려나가려니 돈도 힘도 없어요. 그냥 마음이 아파요.” 올해 초 회생의 빛이 보이는가 싶기도 했다. 전북도에서 박물관으로 등록하라는 요청이 왔다. 준비하라는 서류를 넣었는데 올해 초 다시 연락이 왔다. 일반전시실로 되려면 용도변경을 해야 하고, 정화조시설, 항온항습기, 소방시설, 학예사를 갖추라는 것이었다. 몇몇은 준비를 했지만 무한정 돈을 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안됐다. “도정공장으로 7년 가까이 전시기능을 했는데 이제야 전시시설로 고쳐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지 않잖아요.” 그의 이유 있는 항변이었다. 하지만 공익적 목적을 다하고자 하는 계남정미소를 살리려는 노력에 진안군과 전북도는 원리원칙만을 고수하고 있다. 아무래도 정미소에 모든 시설을 갖춘 박물관으로 등록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서학동사진관은 또 어떻게 된 것일까. 계남정미소를 닫아서 서학동사진관을 연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서학동사진관도 계남정미소처럼 우연하고, 무모한 결정의 조합이었다. 계남정미소의 잠정휴관 이후 힘겨웠던 그가 모든 일을 접고 서학동사진관 부근의 작가 작업실에 놀러왔다 “이런 공간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돈도 없고 힘도 없어 그냥 생각을 접었는데 가격이 저렴한 공간이 나왔다는 말에 또 혹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까운 전주에 이런 공간을 하나 만들고 싶었고, 서울 류가헌 갤러리에서 사진교류전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받은 터였다. 뒷생각하지 않고 ‘질렀다’. “무모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어요.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전히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다른 작가들에게 전시기회도 제공하고 서울에 가지 않아도 사진에 대한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할 생각이에요. 사진 작업을 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공간, 사진을 하려하지만 배울데가 마땅치 않은 사람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서학동사진관의 개관전은 지역 작가들의 작품으로 결정했다. 작가들에게 멘토링도 해주고, 함께 교류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였다. 사진을 공부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도 마련할 생각이다.

쓸쓸한 ‘낡은 방’에서 형상화한 기억들
다시, 그의 사진이야기로 돌아갔다. 10여 년간 그의 이름으로 낸 사진집은 다섯권. 아카이브북스에서 펴낸 『정미소』(2002), 『나는 이발소에 간다』(2005), 『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중』(2010), 『근대화상회』(2010)와 최근 눈빛에서 출간한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이 그것이다. 그의 사진집에는 고스란히 세월이 정지해 있었다. 그의 사진집은 독특함도 있다. 『정미소』를 제외하면 사진집에 비교적 긴 글이 담겼다. 사진에서 볼 수 없는 현장의 목소리와 분위기를 담아보려는 의도에서 사진 속 인물들과 대화하고 기록했던 현장을 꼼꼼히 적은 글들이다.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에서 그의 작업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정미소로만 기억되는 그의 최근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작업인데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낡은 방’이에요. 사진 안 방 풍경과 방안에 있는 사진을 통해 가족사를 읽게 하는 콘셉트인데요, 그간의 작업들이 외형적 작업이었다면 이 작업은 내부로 파고들어, 가족의 역사를 읽고 사라지는 시골방안의 모습을 기록한 거죠.” ‘낡은 방’은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노인과 고단한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방, 그리고 그 방과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기, 가족사진들을 담고 있다.사진이 보여주는 고독은 그의 글을 보는 순간 숨을 멎게 한다.

겨우내 도시에 사는 아들네 집에서 돌아온 할머니는 짙은 검정색으로 머리를 염색했지만 더 늙어 보였다. “아이들에게 아프니 병원에 좀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늙으면 다 아픈 거라고 모른척해. 여기 오니 보건소도 다닐 수 있고 마음 편해.” 구십이 넘은 할머니집은 초가집 오두막을 개조해서 슬레이트 지붕을 이었지만 옛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올봄에 찾아가 보니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집은 헐리고 빈 터만 남아 있었다.

눈을 돌리기도, 다 읽어 내려가기도 힘든 글들이 주석으로 달렸다. 쓰러져 가는 낡은 방이 오히려 편한 주인들의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그는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그 방안에서 가장 화려한 날들을 보내고 가장 쓸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그리고 돌아서서 사라지는 삶들을 기록하는 그의 작업은 정미소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 이전 사진이 시간과 공간을 프레임에 고정시켰다면 ‘낡은 방’은 거기에 더해 더 많은 그리고 상반되는 정보까지도 담으려는 노력의 흔적이었다. 여전히 만족할 만큼 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작업을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무한한 감사를 한다고 했다. 조금 더 객관적이고, 기록성에 충실한 사진을 찍고, 테크닉에 치우치고 모양이 좋은 것만 찍으려하기 보다 사진에 진실성을 담고, 내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그렇다고 계획은 없다. 오늘을 잘 지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사는 그였다. 늦게 시작한 만큼 사진기를 들 힘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 작업을 하겠다고 했다.“쉬어야 할 나이에 이렇게 부지런을 떠는 것은 젊은 날에 못했기 때문이에요.늦은 것이 아니에요. 딱 좋은 시기에 딱 좋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젊어서 시작했다고 더 좋은 사진이 나왔을까요? 그래서 오늘 전시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전시회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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