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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현명한 답변
강준식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이휘현(2017-04-28 10:27:40)



나의 중학생 시절 수학여행지는 다름 아닌 서울이었다. 나를 비롯한 내 친구들에게는 그 당시만 해도 쉽지 않았던, 이른바 촌놈들의 '서울 구경'이었던 셈이다. 3백 명 가까운 학생들을 빼곡하게 실은 관광버스 여섯 대가 그렇게 임실을 출발해 서울로 달려갔다. 88올림픽이 열리게 될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은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남산타워, 63빌딩 등이 목적지였다. 다들 설렘 가득한 표정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 현실은 달랐다. 우선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 버스 안 여기저기서 토사물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5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보는 경험이 다들 처음이었으니 어쩌면 예상된 재난(?)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변이 온통 난장판이 되었다. 우리를 인솔하던 선생님이 신문지와 화장지를 들고 버스 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기에 바빴다.
하지만 진짜 재난은 서울 시내에 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난생 처음 맡아보는 매캐한 공기가 눈과 코, 목을 강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다들 따가운 눈을 쓸어내리기에 바빴던 그 때, 벌건 눈으로 연신 재채기를 해대던 인솔 교사가 우리를 안심시켰다. "얘들아. 이게 최루탄이라는 거다. 걱정 마. 안 죽어!" 그날은, 1987년 6월 10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기억. 열네 살 소년의 기억 속 서울은 정치의 격랑으로 요동치고 있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는 그 기억에 오감을 더하는 하나의 촉매다. 그 해 겨울, 실로 오랜만에 직선제로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비록 나이 어린 중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워낙 뜨거웠던 정치의 계절이었기에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물론, 그 결과에 실망한 주변 어른들의 표정 또한 또렷이 기억한다.
내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에서 투표권을 처음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인 1997년이다. 그 후로 총 네 차례의 대통령선거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대통령 당선에 유효한 투표를 행사한 적이 없다.
첫 투표였던 1997년에는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놀러 가느라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두 번째 투표였던 2002년 겨울에는 진보의 맨 가장자리에 있는 후보를 찍었다. 사회인이 되고 난 후 행하게 된 세 번째, 네 번째 투표에서는 원하지 않는 후보들이 줄줄이 당선되었다.
내가 경험한 시간, 1987-2017. 그 30년 중 앞의 20년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조금씩 꽃을 피워간다는 느낌이 강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판단에는 그랬다. 그리고 그 관성이 쉽사리 깨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지난 10년 사이 무참히 깨어졌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허물어지기 쉬운 모래성이었나? 처음엔 허무했다가 나중에는 절망했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그것도 손 발 차갑던 겨울의 기억은 접어두고, 꽃이 만발하는 봄의 한 가운데에서 대선 결과를 목도해야 하는 일이 생겨났다. 내게는 다섯 번째 기회. 나는 내 인생 최초로 대통령 당선에 유효한 투표를 행사할 수 있을까?
언론인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강준식의 두툼한 책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내 나름의 정치 계절 30년을 정리하는 의미로 구입해 읽은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누구나 대통령을 알지만, 누구도 대통령을 모른다'라는 카피로 무장한 이 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권을 이어간 11명의 대통령과 1명의 총리(4.19혁명 이후 의원내각제가 시행되던 시절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했던 장면 총리)를 집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12명의 인생과 정치역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도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는 매우 객관적인 서술이 눈에 띈다. 나는 이 대목이 이 책이 가진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삶과 생각, 정치행위를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역사와 정치 공부에 매진한 소수를 뺀다면, 대부분의 우리들 머릿속에 각인된 그들의 정치는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 본 일종의 편파적인 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인 통치행위가 작동되면서도 정치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다 보니, 우리가 가진 편파적 해석을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다. 가령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5.18이라는 비극과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건 자연스럽다. 그걸 두고 그가 행한 경제정책의 좋은 일면은 왜 생각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
하지만 '전두환=5.18'이라는 등식에만 머물러있는 정치 인식 수준으로는, 앞으로 전개될 '87년 6월 체제 이후'의 한국정치를 바라보는 안목에 별 도움이 안 될 공산이 크다. 피아의 구분이 비교적 선명했던 87년 이전의 형국에서는 정치를 단순명쾌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유효했다고 본다. 하지만 87년 6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는 상당히 복잡해졌다. 그 복잡함을 단순하게 접근하려고 한 위정자들에게 가장 큰 적폐의 혐의를 씌워야겠지만, 정치의 역동성에 지난 수 십 년 간 민첩하게 적응하지 못했던 시민들에게도 한국 민주주의 퇴행에 대한 약간의 혐의는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시민들이 또 한 번 변화의 기회를 직접 만들어낸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촛불로 적폐 청산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오롯이 시민의 힘이지만, 이 계기를 통해 이제 시민들 스스로도 정치의 복잡함에 눈 뜰 필요는 있다.
그 시작은 곧 치르게 될 대선레이스를 단순과 맹목이 아닌 복잡함과 섬세함으로 관전해야 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마냥 쉽지는 않다. 약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특히 당장 코앞에 닥친 '어떤 대통령을 뽑을 것인가!'라는 고민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정권 교체' 혹은 '보수 재건'이라는 획일화 된 가치를 들이댈 수는 없다. 적어도 포스트 87년 체제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역사에서 통치권을 행사했던 자들의 역정을 짚어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 현명한 선택은 단순한 편 가르기가 아니라 복잡다단한 통치행위에 대한 섬세한 분석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의 고민을 덜어줄 만한 충분한 시간이 우리에게는 없다. 역대 12명 통치자들의 삶을 꼼꼼하게 들여다 볼 시간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럴 때는 깔끔하게 잘 요약된 정리본이 있으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강준식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이 지점에서 미덕을 발휘한다. 한 명 당 40페이지 정도가 균등하게 할애된 이 책에는 그들의 통치 이력에 대한 명암이 군더더기 없이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려 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언론인으로서의 식견과 시민으로서의 상식에 기반한 정치비평이 조심스럽게 녹아있다.
결국 대통령도 사람이다. 하지만 한 위정자의 실수와 과오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실수와 과오의 결과를 통치자가 얼마나 냉철하게, 그러면서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느냐다. 우리는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통치자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를 지난 몇 달 사이 뼈저리게 체험해 왔다. 우리가 투표권을 행사할 때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다. 그 깊은 고민에 강준식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좋은 가이드북이 되어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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