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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 | 연재 [여행유감]
입양아 용 르페베의 아리랑
장재영의 프랑스에서 만난 인연
장재영(2018-07-13 14:27:53)



아침부터 후두둑 비가 내린다. 이번 여행에서 날씨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햇볕 쨍쨍한 Paris 의 날씨까지는 아니어도 동남아 스타일의 스콜은 적응이 안 된다. 미처 우산도 준비하지 못해 비를 찔끔찔끔 맞다 보니 기분까지 가라앉는다. 하지만 올해 들어 두 번째 방문한 프랑스에서야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작은 기대감을 준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렇게도 갈망하던 몽 셀미쉘을 포기하고, 나는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간다. 복잡한 파리 북역(Gare de Nord)의 대합실에 앉아, 오고 가는 다양한 인종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와의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그녀(그녀들)을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여름 즈음이다. `청춘은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는 롱펠로의 말처럼 젊음의 피가 끓던 20대 후반.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나섰던 연예인 매니지먼트의 세계는 마음에 무수한 난도질을 하여 상처만 남겼다.
삶의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던 나는 같은 처지에 있던 C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그냥 무작정 떠나보자. 여행의 진수는 자유에 있다. 차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남쪽으로 가보자. 떠나보면 혹시 청춘의 조급증이 조금은 가라앉지 않을까 싶었다.

목적 없이 여행한지 1주일이 되어갈 무렵 우린 경주에 도착한다. 나는 평소 유적지에 관심이 많아서 찾았지만 C는 지도를 들고 시큰둥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성덕대왕신종을 보니 그나마 잘 왔단다. 짧은 지식으로 에밀레종의 유래를 들려준다. 발길을 돌려 불국사를 향하니 외국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천왕문을 지나니 엄마의 오래된 사진첩에 나오는 청운교와 백운교가 보인다. 교복을 입고 주욱 서 있던 그 계단은 이제 더 이상 밟지 못하여 아쉽다. 소원을 빈다며 제일 꼭대기의 관음전을 찾았다. 시주를 도와주는 할머니가 우리를 부른다. 그 앞에서 일련의 여학생 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다.


"무슨 일이세요??"
"아 글세, 이 처자들이 한국말을 몬 알아들어. 자네들이 이야기 좀 해봐"
"아.네. 한국 분들 아니세요??"
"....."
"Do you speak English?"
"Yes...little bit"


떠듬떠듬 영어를 구사하던 그들은 이란성 쌍둥이이었다. 생긴 것은 영락없이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그들이 신기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1981년 한국에서 태어나서 홀트 아동복지회에 맡겨진 그들은 프랑스의 한 가정에 같이 입양 되었다. 마음씨 좋은 양부모는 그들의 뿌리를 잊지 말라며 아이들의 본명인 진숙과 영숙을 그대로 사용하여 Jin Lefebvre와 Yong Lefebvre 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유복했던 양부모는 어린 시절부터 매년 코르시카나 니스 같은 유럽의 유명 휴양지로 바캉스를 떠나기도 했고, 다양한 사회경험과 교육의 기회를 통하여 대학교까지 마치게 해주었다. 20년이 지나 그들은 한국말과 대한민국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프랑스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불어를 쓰던 그들은 가끔 중국인이라는 오해도 받고, 또래와 다른 생김에 괴롭힘도 많이 당했다. 본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던 프랑스인이라는 자부심에 지쳐갈 무렵 과연 한국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고 한다. 양부모는 흔쾌히 비행기표를 끊어주며 다녀오라 했고, 혹시 친부모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며 그녀들이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세 언니와 오빠들이 있는 막내였다고 출생정보를 알려주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경주였다. 모국을  느끼기 위해 가장 한국적인 곳을 찾았던 것이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던 우리는 강원도로의 여행을 제안했고 그들 역시 바다와 산이 있는 그곳으로 떠나기를 원했다. 처음엔 여자들과의 여행에 설레고 작은 로멘스를 기대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생각과 고민에 같이 공감하고 힘들어하며 때론 기뻐했다. 강릉의 경포대 해수욕장에선 니스의 바다보단 맑지 않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름의 색깔을 알려주었다. 프랑스에는 석화요리가 유명하지만 우리나라는 회가 유명하다며 속초의 대포항에서 회도 처음 먹어보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사실 맘속으로 우리나라가 퍽 괜찮은 나라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온갖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다. 3일 간의 여행은 짧지만 강렬한 유대감을 갖게 해주었고 한국인의 정이란 것을 어렴풋이 알려주었다.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작별하는 길에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는 그들과 떨어지기가 쉽지 않았다. 1달 후에 받은 이메일을 통해 우연하게 그들은 가족을 찾았다는 기쁜 소식과 언젠가는 다시 꼭 오리라는 이야기, C와 나의 환대도 잊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왔다. 좋은 기억을 남겨 준 것 같아 다행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날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Jin Lefebvre 의 친언니라며 Jin 이 한국에 다시 방문하였단다. 같이 만나길 희망하는 그들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우린 그렇게 다시 만났다. 이미 언어를 잃어버려 자매간의 소통은 되지 않지만, 얼굴만 쳐다봐도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던 그 언니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쌍둥이가 태어나고 삼 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급격하게 기울어졌던 가계는 두 아이에게 시련처럼 다가온다. 시골에서 6남매를 혼자 키우기엔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마침내 가족회의를 거쳐 두 아이의 입양을 결정한다. 자기 손으로 직접 아동복지회를 찾아갔지만 몇 번을 돌아 나오던 발걸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도 자신을 따라 한없이 울어대던 그 광경. 아이들을 맡기고 나와 슬픔을 이길 수 없어 온 가족이 한참을 앓아누웠던 일. 지금도 자신들을 찾아준 것이 너무 감사하고 미안해서 바라만 봐도 눈물이 나온단다. 자식을 버리는 그 심정을 감히 상상하기가 어려워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다 보니 외국을 다니며 무수하게 마주쳤던 입양아들이 떠올랐다. 한평생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고민하고, 가끔은 현지인들과 다른 생김새에 몹시도 화가 났을 그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고민과 고통을 어떤 이들은 죽을 때까지 함께 해야만 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들은 한국인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보이는 한국인을 어떨까. 그 모든 질문에 Jin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뿌리 깊게 박혀버린 슬픔과 차별은 아마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단지 자신은 그래도 한국 사람인 것 같다며 따뜻한 정과 가족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하지만 쌍둥이 언니인 Yong은 자신과 생각이 같지 않은 것 같다면 이번 여행에 동참하지 못해서 미안하단다. 아니야! 너라도 다시 찾아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너희들을 버렸던 한국에 살고 있어서.


1시간 가까이 파리의 북부로 달리던 기차는 Compiegne역에 정차한다. 처음 와본 작은 도시는 로마시대의 Catedral로 인하여 그래도 프랑스다운 멋을 풍긴다. 5년 만에 만난 Yong 은 나이를 조금 더 먹었다는 것 이외에는 변함이 없다. 여전히 밝고 맑았으며, 아직도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가 썼던 재미없는 은어들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니 신기했다. 마치 하루 만에 만난 친구들 같았다. 다만 이제는 시간이 지나 가치관은 더욱 프랑스인처럼 변했다. 왠지 맘 한구석에는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전형적인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의자가 전부 밖을 향해 있는 프랑스식 카페에 앉아 프랑스 커피를 마시며, 프랑스인으로 살아가는 Yong의 이야기는 어쩐지 묘한 보색 대비 같은 느낌이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 구체적으로는 혈육들을 만나고 온 이후에 동생인 Jin과 사이가 벌어지고 있단다. 동생과 달리 자신은 정체성의 싸움에서 승리한 듯 보였고 프랑스인으로써의 자부심도 상당해 보였다. 하지만 동생은 한국의 그리움에 푹 빠져 프랑스에서의 모든 삶을 버리고 한국으로의 귀환을 꿈꾸고, 열심히 한국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며 못 마땅해 했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들이었지만 청춘기를 극심한 혼란 속에 보낸 탓에 둘 사이의 간극은 태어났던 간격의 수만 배나 멀어져 있었다. 한국에서 조금 더 좋은 인상을 심어 줬더라면 고국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했을까. 못내 아쉽다. 혹시나 나 때문에 한국을 좋아하지는 않는지 미안했다.
파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머리 속이 복잡했다. 이들에게 한국은 무엇이고 가족은 무엇일까. 태어나자마자 고향에서 버려지고 죽을 때까지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갈 곳이 있는 떠남만이 여행이라고 정의한다면 어쩌면 이들은 평생을 여행자로 살아가야 할 운명은 아닐까.      


그리고 또다시 5년이 흘렀고 나는 삶의 터전을 호주로 옮겼다. 처음 해외 여행지였던 덕에 가졌던 좋은 이미지가 날 이끌었다. 무엇보다도 어디든 잡초처럼 잘 적응하기에 큰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백호주주의의 잔해가 짙게 남아있는 영국의 후예들은 동양인들에게는 도통 마음을 열지 못한다.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전부 중국인으로 생각하는 그들에겐 대한민국은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백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동양인이 지녀야 할 자부심을 유지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곳에선 결국은 계속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
계획했던 대로의 생활이 실패로 돌아가자 극심한 우울증이 몰려왔다. 악마 같은 이 아이는 소리 없이 다가와 귓가에서 달콤한 유혹을 한다. 차디찬 강물에 몸을 던지면 넌 이곳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브리스번 강가를 걷자니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곳이라고, 바로 여기라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시커먼 강물을 보고 있자니 엄마가 나타난다. 너의 집은 여기가 아니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혼란스러웠지만 난 이방인이 아니었다. 여행을 끝내야 할 때가 온 것뿐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생겼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익숙한 이름의 이메일을 받았다. 쌍둥이의 동생인 Jin이었다. 담담한 문장은 짧고 간결했지만 끝까지 읽지 못하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가 알고 있는 영어단어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하지만 `Suicide` 는 단 하나의 뜻을 가진 간단한 단어였다. 언니인 Yong이 어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했다고. 살아가는 동안 감내하고 싸워야 할 정체성의 문제를 끝내는 이기지 못하고, 서른 살에서는 절대 눌러서는 안 되는 멈춤 버튼을 눌렀다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귀에서 유혹하던 아이가Yong의 목소리를 닮았다. 이길 수 없는 슬픔은 없다고 믿었는데 이번 것은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읽지 못할 것을 알면서 메시지를 남긴다. Yong 오래 동안 기억해 줄께. 그곳은 엄마의 품처럼 따뜻하길 바란다. 그리고 많이 고맙다. 너를 추억할 수 있는 사진 한 장을 남겨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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