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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 | 연재 [임안자의 쿠바여행 ①]
변화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쿠바, 내가 듣고 보고 느낀 그들의 이야기
임안자(2018-12-31 11:20:57)

스위스에 살면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임안자씨가 2년 전 쿠바를 다녀왔다. 전주국제영 화제에 쿠바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던 그의 쿠바 여행기를 2회로 나누어 싣는다. 쿠바를 동경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될 여행기다.



2016년 2월 초에 나는 남편과 함께 처음으로 쿠바여행을 했다. 때는 마침 지난 60여 년 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미국과 쿠바 사이의 외교관계가 놀라우리만큼 빠른 속도로 풀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알려지다시피 미국은 반세기가 넘도록 철천지원수 취급을 하던 쿠바와 2014년 12월에 깜짝 수교를 마쳤다. 그러고 1년도 채 못가서 미국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 3월에 쿠바를 방문한다는 발표가 나간 뒤였다. 그의 역사적인 방문과 함께 반세기 동안 쿠바의 경제를 숨죽여왔던 미국의 통상금지정책이 끝나주길 바라는 쿠바는 세기적인 격변기를 앞두고 온 나라가 세차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최근의 정치적 변화에 힘입어 쿠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외국관광객들이 짧은 기간에 갑자기 몇 배로 늘어나는 바람에 쿠바는 뜻밖에 관광의 호황기를 맞고 있었다. 쿠바여행사의 통계에 따르면 10여 년 전부터 20%씩 오르던 관광객이 2015년에는 300만을 넘으면서 관광사업은 오늘 쿠바의 가장 주요한 수입자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쿠바에서 일고 있는 관광 전성기에 대해 어느 유럽 외신기자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 물이 들기 전 쿠바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썼는데, 실제로 우리의 친구들도 "너무 늦기 전에 가보고 싶다"며 서둘러 쿠바를 다녀왔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의 여행은 비록 2주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변화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쿠바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시기였다.
 
왜 쿠바를 간데는

사실 쿠바에 대한 내 관심은 꽤나 오래전에 시작됐다. 80년대 중반에 멕시코, 페루, 칠레 등의 남미문학에 한참 빠져있을 무렵에 우연히 알레호 카르펜터의 소설을 읽으면서 쿠바에 대한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게 나중에는 살사음악으로 넓혀졌고 90년대 끝에 가서는 유럽의 국제영화제서 뛰어난 쿠바영화들을 보면서 쿠바문화에 대한 내 호기심은 차츰 쿠바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무르녹았다. 내가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를 위해 쿠바영화 회고전을 만들었던 것도 그 열정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내 프로그램에 들었던 열일곱 편의 영화는 그 당시에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희귀 작품들이었는지라 상영장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회고전 행사를 계기로 쿠바에서 두 감독들이 쿠바영화예술산업원(ICAIC)의 해외 여담당자와 함께 전주영화제를 직접 방문했고 그중의 하나인 패르난도 페레즈 감독의 영화 <스위트 하바나>가 그해 전주영화제의 '디지털 스펙트럼' 부문의 대상을 받음으로써 쿠바 열풍을 일으켰다. 그와 더불어 EBS방송사에서도 회고전의 영화 여섯 편의 방영권을 사들여 2004년 후반에 6개월 동안 전국에 방영한 바 있다. 사회주의의 비수교국인 쿠바의 영화들이 한국 관객과 만날 수 있었던 건 그게 처음이었다. 사실 냉전이 계속되고 있던 그 때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면 쿠바 회고전은 누가 봐도 절대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한국과 쿠바 두 나라가 외교의 장벽을 뛰어넘어 문화교류의 차원에서 서로 도와줬기에 회고전이 가능했다. 


국영호텔과 카사 파티콜라
쿠바여행은 전주영화제의 회고전이 있은 지 12년만에 드디어 이뤄졌다. 우리는 스위스의 여행사를 통해 미리 예약한 아바나의 카사 파티콜라로 불리는 개인집에서 짐을 풀었다. 민박은 호텔보다 값이 훨씬 싸기도 하지만 주인집의 일상생활에 쉽게 어울릴 수 있어 우리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카사 파티콜라는 21세기에 들어 계속 늘어나는 해외여행객의 편리를 위해 정부가 새로 도입한 대안의 숙박제도로서 방값이 싸기 때문에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민박숙소는 정부의 허락만 있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사업이다. 그러나 대부분 자본부족으로 해외에 특히 미국으로 (불법)이민을 간 가족이나 친척들이 보내는 돈으로 민박에 투자를 하고 있으며 우리 숙소의 주인집 역시 독일에서 살고 있는 첫째 아들의 도움으로 민박을 차렸다. 쿠바의 사정을 잘 아는 친구의 말대로라면 "가정마다 알게 모르게 외국으로 이민을 간 자녀나 친척이 적어도 한 둘 있으며 이들이 보내는 돈으로 살아가는 가족이 밖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쿠바의 이름난 호텔과 음식점은 거의 국가에 소속돼 있으며 카사 파티콜라 말고도 최근에 여러 형태의 개인소유 호텔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국영 호텔은 민박에 비해 몇 배나 비싼 대신에 국영음식점은 개인소유의 음식점보다 비교적 싼 편이지만 관광객이 많아질수록 비싼 개인 음식점들이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하바나의 오래된 광장의 하나인 '풀라야 비에야'에서 가까운 골목에 세워진 연립주택의 2층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였다. 비좁은 방들과 작은 거실 그리고 너무 적게 흐르는 수돗물 등에서 서민층의 여유롭지 못한 살림살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동네사람들과 관광객들로 항상 붐비는 아파트 맞은편의 조그만 정원에는 익살스러운 모습의 조각품과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이 새겨진 철판이 보였고 나이 들은 나뭇가지 위에서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거실까지 들리는 등 나름 정원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파트의 주변도 눈여겨 볼 게 많았다. 비에야 광장의 한쪽에 있는 큼직한 음식점은 전통적으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비롯한 '살사음악가들의 연주장'으로 이름나 있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이브라임 페러, 프란시스코 레필라도, 루벤 곤잘레스, 올란도 로페즈, 마뉴엘 갈반. 마뉴엘 리세아. 피오 레야바 등 쿠바음악의 혼으로 불리는 이들이 1997년 그래미 상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1999년 독일의 빔 벤더스 감독이 같은 이름으로 음악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쿠바 감독 리고베르트 로베르토가 만든 다큐 영화 <살사를 찾아서>도 살사음악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이들 영화의 영향을 때문이었는지 2016년의 아바나는 마치 쿠바음악의 부흥기를 맞은 듯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음식점이나 길거리 또는 술집에서 살사, 차차차. 재즈음악들이 계속 넘쳐흘렀다. 그 중에서도 쿠바여행 마즈막 저녁에 국립예술박물관의 음악실에서 있었던 트럼펫 연주자 야섹 만자코의 지휘로 진행된 재즈의 밤은 가장 인상적인 음악회로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그밖에도 우리가 닷새 동안 돌아본 남쪽의 피나르 델 리오 지역의 비냘레와 트리니다드에서도 똑같은 광경이 벌어졌다. 특히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인구 4만의 트리니다드는 음악의 천국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뛰어난 음악인들의 연주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그뿐만 아니라 트리니다드에는 아프리카 전통춤을 보여주는 '아프리카의 집'도 하나 있었다. 조그만 집의 마당에는 아프로쿠바인 세 남자들이 힘차게 드럼을 쳤고 그에 맞춰 아프로쿠바 여인 둘이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보자 서슴없이 손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서툴지만 그러나 흥겹게 춤추며 그들과 한껏 즐겼다. 쿠바음악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왔다. 16세기 초 아프리카인들이 쿠바에 노예로 끌려온 뒤에 후손에게 몸소 전해준 음악이 나중에 서구 음악과 합쳐지면서 오늘날 세계의 주요 음악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 반면에 스페인으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음악은 20세기 초 스페인의 식민주의가 끝남과 함께 서서히 빛을 잃었다.   


주인집 가족
60대쯤으로 보이는 주인집 부부 마리아와 칼로스는 쿠바인들 특유의 열린 자세로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줬고 방값에 비해 아침식사는 푸짐했다. 과야바 바나나 파인애풀 달걀부침과 빵 등이 수북하게 식탁 위에 올랐고 쿠바의 커피 맛이 아주 좋았다. 아침 식사를 하는 거실의 벽에는 체케바라의 사진과 그에 대한 신문기사와 연설문 등이 들어있는 액자가 하나 걸려있었는데 피델 카스트로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걸로 봐서 이들은 체케바라를 더 좋아하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주인집 부부는 영어를 못했고 우리는 스페인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쿠바 정세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을 나눌 수가 없었다. 어쩌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배우는 둘째 아들 다비드가 집에 있을 땐 영어통역이 좀 됐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앞에서 말한 체케바라는 주인집뿐만 아니라 쿠바 어디에서도 자주 보게 되는 혁명정부의 아이콘으로 높이 떠올라 있었다. 알다시피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일으킨 뒤 나중에 볼리비아 내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젊은 나이에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죽은 뒤에도 그는 쿠바는 물론 세계 각처에서 여전히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21세기의 젊은 세대에게까지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즐겨 쓰던 베레모는 채플린의 모자처럼 그의 상징이 되어버렸고 젊고 섹시한 그의 체격에서 풍기는 남성미는 예나 지금이나 숱한 젊은 여성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사실 쿠바는 스타의 전통이 없는 나라다. 그럼에도 일반 서점이나 상점에서부터 쿠바여행사의 기념품상점에까지 체케바라는 절대로 빠지지 않는 인기 종목이 되어서 오늘날 쿠바의 슈퍼스타 대접을 받고 있다.  


쿠바의 여성들  

흔히 남미의 남자들을 마초로 부르는데 쿠바남자들 역시 대부분 혁명이 반세기를 지난 오늘날에도 남성우월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몸집이 큰 칼로스나 허약하고 작은 대비드는 마초와는 거리가 멀었다. 둘은 부엌에서부터 청소까지 집안일을 다 맡아했고 우리 아침 식사도 주로 칼로스가 만들어줬다. 대신 마리아는 시장을 보고 빨래를 했는데 우리 말고도 손님이 한 명 더 있어서 그런지 이들의 하루는 아주 바쁘게 돌아갔다.  
쿠바 여성에 대한 인상은 한마디로 개방적이고 능동적이었으며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아주 높았다. 쿠바혁명과 함께 60년대부터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인데, 그 결과 현재 전국 대학생의 반절이 여학생이다. 그리고 국가기관의 판사, 검찰, 변호사, 연구원, 기술자 등의 고급 전문직을 가진 여성이 50%를 넘고 그밖에도 국회의원의 48%가 여성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숫자다(1년 전의 국회의원과 지방선거에서는 여성후보자들이 각각 50%의 승리를 거두었다). 여성이 출산하면 100%의 월급과 9개월 휴가가 주어지고 출산 뒤에는 3개월의 휴가와 월급의 75%를 받는다. 그리고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하거나 가족계획을 할 때 모든 경비는 국가에서 부담하며 동성애자들과 성전환자들에 대한 법적차별도 없어진지 오래다.


쿺과 쿡의 차이
쿠바의 화폐는 쿺(CUP)과 쿡(CUC)의 두 단위로 나눠져 있다. 전자는 '페소 쿠바노'를 뜻하며 쿠바 원래의 화폐로서 현재 쿠바인들이 쓰고 있는 돈이다. 후자는 '페소 콘버티불'의 약자로 외국인을 위해 따로 만들어진 화폐인데 쿡은 쿠바 어느 곳에서도 달러나 유로로 바꿀 수 있으며 1쿡은 1달러 수준이다. 그러나 쿺은 쿡과 바꿀 수 있지만 다른 유러와 달러는 바꿀 수 없고 쿺의 값어치는 쿡의 0.25 센트 정도로 쿡의 1/4에 해당한다.
두 화폐가 공존하는 데는 90년대 쏘련의 지원이 끊긴 뒤에 응급조치로 생겨났다고 하는데, 두 화폐는 사용면에서도 조금 다르다. 외국인은 쿡으로 쿠바인들이 사용하는 상점이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 없다. 쿠바인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상점이나 가계는 모두 국가에서 관리하며 국민의 생활수준에 맞춰져 값이 상대적으로 싸다. 그 대신 외국인이 드나드는 상점에서는 쿺을 가지고 살 수 없으며, 있다 해도 서민에게는 너무 비싸고 상품의 선택도 제한되어 있어 불편하다. 그러나 2016년부터 쿡을 가진 시민을 위해 일부 상품 값을 20% 내린다고 했는데 짐작컨대 평행선의 화폐제도에도 어떤 변화가 일고 있지 않나 싶었다.  
쿠바에서 노동자를 포함한 서민의 평균 수입은 한 달에 20-25 쿡 정도로 아주 낮은 편이다. 주인집 부부도 민박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일상은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쿠바 정부는 생필품을 배급제로 관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1인당 한 달에 여섯 개의 달걀, 3킬로 쌀과 기름 한 병, 1킬로의 커피와 설탕 등인데, 식품이나 교통비 등 시민의 일상에 절대 필요한 것들에 들어가는 비용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그 대신 상품이 여러 곳에 흩어져 팔리고,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시장 보는 데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걸린다.
쿠바의 경제사정은 1991년 쏘련의 해체 이후 쿠바에 주어지던 경제적 도움이 끊기면서 갈수록 나빠져 오늘의 최악상태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1961년 미국이 쿠바의 피그스 만 침략에 실패한 뒤에 즉시 적용한 통상금지정책은 쿠바의 경제발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게다가 내부사정으로 생긴 경제위기도 가난을 부추기는 원인이 됐다. 
알려지다시피 쿠바는 지난 세기에 세계에서 으뜸가는 설탕수출국이었다. 지금도 설탕은 담배와 함께 쿠바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지만 90년대부터 설탕시장의 국제적 변동으로 말미암아 설탕생산이 옛날의 반절로 떨어졌고 2015년에는 설탕을 수입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카스트로의 오랜 독재정치로 빚어진 후유증도 물론 경제발전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런 와중에 최근 냉전을 녹이는 화해의 바람이 쿠바에 불어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데 쿠바인들 대부분은 미국과의 수교와 오마바 대통령의 방문을 일단 희망적인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2015년 5월에 올랑드 대통령이 프랑스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문을 하고 라울 카스트로 쿠바의 현대통령이 2016년 2월에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초청을 받음으로 쿠바와 유럽의 외교정책에도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정치적 차원을 떠나서 2015년 프란체스코 교황이 미국과의 수교가 끝난 두 달 만에 쿠바를 방문함으로 냉전으로 인한 서구와의 종교적인 장막이 무너지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국민 모두가 빠른 변화를 원하는 건 아닌 듯했다. 현지의 여론에 따르자면 대부분은 바뀔 환경에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지만 쿠바의 전통과 정체성이 자본주의의 위세에 밀려 하루아침에 허물어질까봐 두려움과 불신으로 반응하는 소수층도 있었다.    
국제 매체를 통해 이미 알려지다시피 쿠바정부는 미국과의 수교 조건으로 네 가지를 요구했다. 미국이 19세기 말부터 불법적으로 쓰고 있는 미국의 해군기지 관타나모 지역을 되돌려 줄 것, 미국의 60년에 걸친 엠바고 때문에 쿠바 국민에게 끼친 경제적 피해의 보상, 쿠바의 독립을 존중할 것, 쿠바는 자국이 원하는 나라와 경제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등이었다. 참고로, 쿠바의 동남쪽에 딸린 140km의 관타나모 지역엔 알다시피 2002년부터 '9.11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폭격의 테러리스트들'을 가두어둔 악명 높은 미국군대의 감옥이 있다. 쿠바정부는 2013년 유엔의 인권회의에서 관타나모 기지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중에 미국의 침략으로 인해 '빼앗긴 땅'이라며 쿠바에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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