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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 | 연재 [유주환의 음악이야기 ①]
우리 아파트 사람들을 뭘로 보고!
유주환(2019-01-15 12:46:23)

"Every people has its special mission, which will co-operate towards the fulfilment of the general mission of humanity. That mission constitutes its nationality. Nationality is sacred."

- Act of Brotherhood of Young Europe, 1834


"어느 민족에나 사명은 있다. 사명은 협력을 통해 위업에 이른다.
민족의 고유함이란 이 사명을 매개로 삼는다. 민족성이란, 그래서 신성한 것이다."

- <형제동포주의강령>, 청년유럽협회, 18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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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연소성이 강한 물질입니다. 불꽃으로 빠르게 반응하는 이 물질은 어느 사소한 발화점에서라도 무섭게 반응합니다. 민족주의를 과거의 시들한 말 하나로 여기는 이도 있지만, 사실 이 말은 퇴행도 소멸된 적도 없습니다. 소비에트가 붕괴된 1989년 유럽에도, 트럼프와 러스크 벨트에도, 로힝야와 시리아 난민에도, 모두 그 바탕에 잠재된 물질은 민족주의입니다. "우리 아파트 사는 사람들을 도대체 뭘로 보고!" 악다구니 치는 누군가에 잠재된 것도 민족주의 DNA의 변종입니다. 

민족은 근대의 발명품입니다.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와 같은 역사로 결속하는 사람들의 모둠이죠. 인종 집단ethnic group이 우리 민족과 저네 민족, 그 경계를 판단하는 가늠자라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피부빛 같은 것으로 나누는 행위를 말합니다. 원래 19세기 이전의 유럽인은 그냥 유럽 땅에 사는 아무개일 뿐, 굳이 서로를 구별하는 법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영국 왕실이 프랑스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 합스부르크의 누이가 에스파냐 왕비가 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민족은 나름의 결이 있다. 우리 행로는 우리가 결정한다." 이런 신념으로 무장한 이를 '적극적 민족주의자'라 부릅니다. 1800년대 적극적 민족주의자들이 공공의 적으로 삼은 국가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입니다. 특히 오스트리아가 악의 축이었습니다. 저 나라와 내 나라를 구분하는 기준은 인종이 아닌 군주라는 빈 의회 선언이 그들의 염장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인을 비롯해 이미 여러 민족이 살고 있는 국가였습니다. 만일 인종주의가 제국의 정치 원리로 작동하게 된다면, 다수 인종은 주류로, 소수는 아류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아류는 억압해도 되는 것이며 이는 매우 마땅하다, 이런 집단 무의식이 주류에 팽배하게 된다면, 그게 지옥인 거죠.


우리 편 아니면 다 꺼지라는 야비한 갈라 치기의 이론도 필요했습니다. 적극적 민족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대신할 과거의 드라마를 찾고, 이를 역사에 편입시켰습니다. 19세기에 역사학이 홍수를 이루었던 또 다른 이유입니다. 여기에 당위를 부여한 것은 정치였습니다. 역사와 정치는 서로 얽혀 민족의 언어와 사는 곳과 공유되는 신화 속에서 기능하는 사람들의 결사라는 사전적 의미를 매우 불량한 방향으로 끌어냈습니다. 세계를 갈가리 찢어 놓고, 폴란드를 사라지게 하고, 600만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내고, 이슬람과 불화하고, 외국인 노동자와 시리아 난민과 중국의 동포를 혐오하게 하며, 잘 사는 아파트와 못 사는 아파트로, 인간을 나누게 했습니다. 민족주의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가 예술에 작동될 때, 그리고 음악에 기능하면서 매우 다른 양상을 띠게 됩니다. 그 중심에 슬라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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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슬라브 러시아는 1790년대 초에 방대한 러시아말 사전과 문법책을 발간합니다. 그들도 신화와 정치에 몰두했다는 점에서 인종주의의 원죄를 면하기 어렵지만, 한편 언어를 정신의 고갱이로 삼았다는 점이 참 멋집니다. 서쪽의 슬라브 체코는 1792년 <보헤미아어와 옛 문학의 역사>라는 책을 펴냅니다. 도브롭스키Joseph Dobrovský의 이 책은 겨우 남의 민족 두드려 팬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닌, 자기네 말의 내력을 역사로 삼은 것입니다. 이 두 슬라브들의 저작은 저열한 인종 원리를 이데올로기로 삼지 아니하고, 언어에 바탕한 인쇄 문화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 이점에서 탁월합니다. 구어口語가 형식을 두르게 되면 언어가 되고, 언어가 인쇄로 고착되면 문화가 됩니다. 인쇄 문화는 언어를 변하지 않는 문화적인 물질로 거듭나게 합니다.


정치와 인쇄가 교각을 이룬 지점에 러시아와 체코 두 슬라브들은 음악이라는 점 하나를 더하게 됩니다. 음악도 인종을 특정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국민악파로 분류되는 음악가들, 예를 들면, 러시아 5인조, '스메타나들', '드보르작들'이 유독 슬라브에 집중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악파'란 19세기 민족주의자 작곡가들을 일컫는 순화된 말입니다. 이 음악가들 생각의 바탕도 인종주의지만, 그 이데올로기가 다른 음악을 억압하지 아니하는, 국민악파는 이전 시대 빈의 고전주의 일색을 극복한,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드물게 매우 건강한 인종주의 운동입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스스로 경쟁하는 법이 없고, 오직 사람이 음악으로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내 음악으로 저 음악과 경쟁한다는 의미는 저 음악과 내 음악을 모두 동일한 트랙에 올려놓고 나서야 가능할 일입니다. 같은 스타디움에 그와 내가 맞추어 선다는 것은 비록 그와 나는 다르지만, 내가 그를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그 다원성을 품은 뒤에만 가능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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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 러시아의 국민주의 작곡가들과 슬라브 체코의 국민주의 작곡가들 사이에는 교집합과 여집합이 있습니다. 모두 자기의 특성이 담긴 선율과 리듬에 주목했다는 점, 이것이 교집합입니다. 예를 들어, 체코의 드보르작은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의 노래를 인종의 이디엄으로 생각했습니다. 러시아 5인조는 코자크와 코카시안의 음악을 자기 뿌리로 판단했습니다. 한편, 정체성을 애써 슬라브에 맞추고 싶었던 5인조의 음악도 기술만큼은 빈 고전주의와 닮아 있습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는 정련된 빈의 기법을 넘어설 대안이 딱히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음악의 멜로디는 코카시안이지만, 그 멜로디를 받드는 콘텐츠는 여전히 빈인, 말하자면, 선율은 우리 판소리이지만 피아노로 반주를 하는 아이러니에 놓이게 됩니다. 드보르작의 음악도 이 점에서는 도긴개긴이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여집합도 있습니다. 드보르작은 (5인조 보다) 엄격한 고전주의 전통에 익숙했던 작곡가입니다. 힐끔 브람스의 영향도 문득 이는, 어떤 작품은 슬라브 버전의 브람스를 듣는 기분입니다. 논리적인 소나타와 대위법을 좋아하고, 낯빛에 우수가 깃든, 민속 취향의 브람스에 익숙한 분이라면, 드보르작도 직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은 (드보르작 보다) 더 꼼꼼한 매뉴얼에 바탕합니다. 그들은 러시아 냄새가 풍길 만한 음악이 무엇인지 아예 계획을 짜 놓고 작곡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조調에서 다른 조로 이동할 경우, 고전주의식의 논리적 진행보다는 더 충동적인 방식의 설계를 합니다. 감정이란 논리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 이 점을 그들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민요의 제창을 작품에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들판에서 경작하는 이들의 일노래처럼 하나가 메기고 다른 이가 받는 '교환하는 노래'가 더 러시아다, 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농경에 천착했던 어느 민족에게나 교환창heterophony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 전통음악에도 존재합니다. 교환창은 중앙 유럽인들의 돌림노래canon와 다릅니다. 돌림노래는 처음 노래와 그 나중이 과연 정확히 일치하는가, 그 다름없을 정확성에 집중하지만, 교환창은 서로 시김새의 '이음성異音性'에 집중합니다. 같은 DNA를 가지는 노래가 메기고 받는 과정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다양성을 선으로 삼습니다.

히틀러는 유태인을 쥐새끼로 표현했습니다. 전염병을 옮기는 것들이며 인류의 적이라고 선동했습니다. 나치는 라이프치히에 있던 멘델스존 동상을 쓰러뜨리고, 쓰러진 멘델스존을 쇠사슬 탱크로 끌고 다녔습니다. 히틀러가 세계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줄곧 주장한 것이 민족입니다. 낭만적이면서도 그럴 법하게 들리는 저 이데올로기의 위력은 여전히 악마적입니다. 음악에서의 민족주의는 나와 다른 남을 억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히틀러가 멘델스존을 부정했지만, 따져보면 그가 부정한 것은 유태인입니다. 히틀러가 멘델스존의 음악마저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할 수가 없었겠죠. 우리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와 남 사이에 은닉되어 있을지 모를 어떤 지경을 얻고자 함입니다. 작곡가가 남긴 감정의 지경이 악보에, 악보에 담긴 이 지경을 연주가가, 그리고 다시 청중에 전달되는 감정의 지경, 모든 것이 창작과 연주와 감상의 과정입니다. 그 지경을 우리는 종종 공감이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그 공감은 나와는 도대체 시간도, 언어도, 문화도, 어느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는 남의 민족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에 감동하게 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벽두는 늘 다짐으로 넘칩니다. 올해는 운동을 하겠다. 담배를 끊겠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 그런데 이런 다짐의 거개는 나를 향합니다. 물론 다 멋진 생각들입니다. 이건 어떨까요. 올해는 이웃과 인사하겠다. 상처 줄 말은 하지 않겠다. 약자에 관심도 가져보겠다. 이렇게 공감으로 채워진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세상은 무대가 될 수 있을지, 우리는 음악이 될 수 있을지, 그 감동의 지경도 경험할 수 있을지, 저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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