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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생산적 미래주의와 혈연중심의 가족주의로 구축된 보수적 판타지
<미래의 미라이>
김경태(2019-02-25 14:53:24)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시간과 공간, 정체성의 '경계'를 쉽게 허문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리프를 소재로 하고 <늑대아이>는 인간과 늑대의 정체성을 오가며 <괴물의 아이>는 도시의 벽 뒤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괴물과 인간을 가족으로 묶어낸다. <미래의 미라이>에서는 마당이 현재를 과거나 미래와 연결시켜주고 현실과 환상을 이어주는 경계의 공간이다. 경계를 부수는 것은 분명 창의적인 상상력의 몫이다. 더욱이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을 탐미적으로 재현하면서 관객은 부지불식간에 그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든다. 4살의 '쿤'이 이제 막 태어난 여동생 '미라이'가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을 질투하며 마당에 들어설 때, 그의 놀란 얼굴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카메라는 빠르게 변하는 배경을 통해 판타지의 세계를 황홀하게 창출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창의적 상상력과 탐미적 재현이 이데올로기적 보수성과 만난다는 것이다.


영화는 쿤과 미라이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미래는 바로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 미래를 상징한다. 부모가 쿤의 여동생 이름을 '미래'라는 뜻의 '미라이(みらい)'로 지은 것은 이를 단적으로 예시한다. 심지어 미라이는 '미래의 미라이'로, 훌쩍 커버린 소녀의 모습으로 쿤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3월 1일까지라는 기한을 넘긴 채 전시되어 있는 '히나 인형'을 치우러 왔다. 하루를 초과할 때마다 자신의 혼인 시기가 일 년씩 늦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곧 출산의 지연으로 이어진다. 미라이는 자신의 미래, 즉 결혼 후 태어날 아이를 수호하기 위해 과거로 온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매우 명료하게 '재생산적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를 표방한다.


또한 그 미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가 뒷받침 되어야한다. 쿤은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 자기 또래의 장난꾸러기 엄마와 만나 집안을 어지럽히고, 지금의 아빠 나이 때의 멋있는 증조할아버지를 만나 용기를 배운다. 그러한 경험들은 엄마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계기이자,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도록 이끄는 동력이 된다. 과거는 그저 미래에 앞서 있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된다.    


쿤은 가족들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오해하며 가출을 상상한다. 홀로 전철에 몸을 싣고 도착한 도쿄역에서 그는 분실물 담당자 앞에 줄을 선다.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묻지는 쿤은 대답하지 못한다. 나의 존재를 입증해 줄 가족이 없다면 나는 분실물에 불과하다. 나의 이름을 불러줄 가족들이 있어야만 나는 '외톨이'가 되지 않는다. 쿤은 뒤늦게 여동생의 이름을 기억해내며 위기를 탈출한다. 여기에서 가출을 해서는 안 되는 보다 근본적인 연유는, 다른 가족들이 나의 안위를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안에서만,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는 가치 있기 때문이다.

 

쿤은 미래의 미라이의 손을 잡고 하늘을 난다. 차곡차곡 쌓아온 가족의 연대기를 일별하며 핏줄의 의미를 되새긴다. 전쟁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바다에 빠진 증조할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살아남고자 하지 않았다면, 또 증조할머니가 다리를 절뚝이는 그와의 달리기 시합에서 일부러 져주지 않았다면, 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미라이는 말한다. 결국 그 가족 앞에는 혈연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다. 혈연중심의 가족주의는 재생산적 미래주의와 만나 판타지의 옷을 입고 보다 견고한 이데올로기로 구축된다. 그 이데올로기는 증조할아버지가 참전한 그 전쟁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다만, 생존을 위한 용기 있는 결단을 치하하고 장애를 갖게 된 패잔병에 대한 연민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들을 통해 민족의 미래가 이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을 뿐이다. 이제는 그 '오래된' 미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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