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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규범적 시간성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한 달리기
아워 바디
김경태(2020-01-15 10:21:47)



‘자영(최희서)’은 8년간 해온 행정고시 공부를 아무런 대책 없이 포기한다.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나이에 신입사원으로 취업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녀는 그동안 지켜온 모범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어머니의 뜻대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래가 보장된 안정적인 직업인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고시 준비를 했지만, 그 규범적인 시간성으로 뒤늦게나마 이탈하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그녀의 생활비를 끊어버린다. 막막해진 생계 앞에 달리기로 단련된 건강한 육체의 ‘현주(안지혜)’가 나타난다. 자영은 그녀의 몸에 매혹된다. 처음 본 그녀의 몸체는 자영의 시선 속에서 분절된다. 자영은 그녀처럼 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이제 그녀에게는 오롯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비규범적인 목표가 생겼다. 어느 날 밤, 자영은 달리는 현주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뒤를 좇아서 뛰기 시작한다. 그러다 지친 자영은 주저앉아 서럽게 운다. 현주는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한다. 동갑인 그들은 금세 친한 친구가 된다.



자영에게 현주는 선망의 대상이자 욕망의 대상이다. 사실, 그 경계는 모호하다. 자영은 현주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동성을 향한 과잉된 응시는 의례 동성애적 욕망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들이 술을 마시며 남성과의 섹스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런 의심은 이내 사그라든다. 방황하던 현주가 석연치 않은 사고로 죽은 뒤, 자영은 벗은 현주의 몸을 안고 쓰다듬는 꿈을 꾼다. 그 손길은 위로와 탐닉, 동경과 질투, 그 사이에서 모호하게 부유한다. 특정한 감정으로 발화되지 않은 채 표류하는 그것은 타자와 폭넓게 교섭하는 방식이다. 이제 자영의 시간은 선형적 궤적이 아니라 현주를 향해 흘러간다.

현주에게 배운 달리기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행위로 수렴되는 여가나 취미 활동에 머무르지 않는다. 소위 ‘워라벨’이라 불리는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동시대의 요구는 신자유주의의 전략적 개선에 불과하다. 또한 달리기를 가르치는 전문 강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달리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무한 경쟁으로 쟁취할 수 있는 삶, 즉 미래가 보장된 직장과 안정된 소득에 안주하는 삶에 대한 저항이다. 자영은 몸의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재)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리기에 집착한다. 과잉된 달리기는 인간을 그 근원인 육체로 되돌리고 신분과 성별로 규격화될 수 없는 원시적 육체는 규범적 시간성을 거스르기 위한 시발점이 된다. 그녀는 달리기를 통해 자신의 몸을 재각인하며 신자유주의적 목표로 정향된 자기개발의 시간성으로부터 탈주하고자 꿈틀댄다.



자영은 오래된 친구 ‘민지’의 소개로 그녀가 일하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민지는 그런 그녀를 동정하며 일당에 자신의 돈을 보탠다. 달리기에 집착하며 출근을 하지 않는 자영의 집에 찾아가 그녀를 어르고 달랜다. 민지는 자영의 삶과 그 모든 행위를 관습적인 기준에 따라 동정하고 재단한다. 그 설득에 따라 결국 회사로 돌아간 자영은 인턴이 된다.
한편, 어머니는 자영이 정규직이 될 확률이 높은 인턴으로 뽑힌 뒤에도, 축하를 하기보다는 보다 안정적인 직업인 공무원이 되기 위한 시험 준비를 틈틈이 병행할 것을 종용한다. 민지와 어머니에게 달리기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영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그녀를 규범적 시간성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애쓴다.

그러나 자영은 끝내 정규직 면접을 포기하고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급 호텔로 향한다. 그곳에서 룸서비스를 시켜서 먹고 소파에 누워 자신의 몸을 만지며 자위를 한다. 안정적인 미래를 버려둔 채, 당장의 쾌락을 좇아 돈과 시간을 탕진한다. 그것은 비록 일시적이지만 균질한 생산적 시간을 위반하고 전복하기 위한 저항의 몸짓이다. 규범적 서사와 비규범적 서사 사이에서 갈등하며 줄다리기하던 자영은 마침내 시간을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로 통제하는 주체로 우뚝 선다. _김경태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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