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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나이 듦에 대한 가장 탐미적인 헌사
페인 앤 글로리
김경태(2020-03-06 11:49:06)



척추 수술 후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는 노년의 영화감독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는 복원 시사회에서 32년 만에 자신의 데뷔작을 다시 보게 된다. 이를 계기로, 당시 불화를 겪었던 주연배우 ‘알베르토’와 다시 만난다. 살바도르는 당시의 복잡했던 심경을 덜어내면서 비로소 그의 연기를 다시 보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헤로인을 흡입한다. 촬영을 앞둔 알베르토가 그랬고, 또 동성연인 ‘페데리코’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것은 삶의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도주를 돕는다. 이제 그는 진통제를 대신해 헤로인을 찾으며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너무 사랑했었던 페데리코와 재회하고, 4년 전 죽은 어머니를 회상하며, 더 멀리, 첫사랑의 희미한 기억과 마주하며 그 뒤늦은 일탈로부터 벗어난다.



늙고 병들어 앞으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던 그에게 우연처럼 찾아온 과거의 흔적들은 삶의 새로운 동력이 된다. 바쁜 현재를 핑계로 밀어냈던 과거의 기억들이 이제는 텅 비어버린 현재의 틈 사이로 하나둘 비집고 들어온다. 그는 헤로인 중독이었던 페데리코를 돌보며 힘들지만 아름다운 나날들을 보냈다. 그 추억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마드리드는 그에게 지뢰밭 같은 도시이지만,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다. 삶의 고통은 창작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로 떠난 페데리코는 여자와 결혼을 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마드리드로 잠시 돌아온 그는 그때의 아련한 감정에 휩싸여 살바도르를 찾는다. 마주 앉은 그들은 눈시울을 붉힌 채 환담을 나눈다. 이제 와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다. 이후 살바도르가 만든 영화들은 오롯이 페데리코와의 사랑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재회 후, 그는 창작의 욕망을 되찾는다. 헤로인을 끊고 병원을 찾아 제대로 치료를 받고자 한다.


다음으로, 살바도르는 함께 보낸 어머니의 말년을 떠올린다. 어머니를 간병하며 비로소 그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를 보낸 지 4년이 흘렀지만 떨쳐버리지 못한 부채감을 안고 있다. 어머니는 그가 다시 창작에 몰두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그는 어머니의 삶이 담긴 영화로 속죄의 마음을 전하려 한다.



끝으로, 어린 시절, 자신에게 글을 배우던 아름다운 청년 ‘에두아도르’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일사병으로 쓰러진 기억과 겹쳐진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달뜬 몸의 원인이 뜨거운 태양이 아니라 늘 그랬듯 그였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영화는 그가 나체로 몸을 닦는 롱 쇼트와 침대에 엎드린 채 혼미해진 정신을 부여잡으며 겨우 눈을 뜨고 있는 살바도르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를 교차 편집하며, 살바도르가 그의 벗은 몸을 응시하며 달아오르는 듯한 착시효과를 불러온다. 따라서 수건을 건네기 위해 힘들게 몸을 일으켜 그와 마주한 순간, 쓰러진 것은 그의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아름다워서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는 그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그러나 아직 그것을 언어화하지 못한 가장 원초적인 장면일 것이다. 불현듯 찾아온 그 기억의 한 조각조차 그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살아갈 날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추억이 늘어난다는 것에 의미를 둬야 한다. 그 모든 추억은 창작의 재료이다. 나이 듦에 따라 수반되는 육체의 고통은 나를 대하고 세상을 대하는 감각을 보다 예민하게 벼린다. 괴로운 만큼 자신의 몸과 과거를 진중하게 돌아보는 계기,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꼼꼼히 톺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 모든 감각들이 곤두선 사색의 시간은 아직 남아있는 미래의 영광을 위한 밑거름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페인 앤 글로리>는 나이 듦을 축복하고 병든 몸을 긍정하는 노년에 대한 가장 탐미적인 헌사이다.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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