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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 | 연재 [윤지용의 두 도시 이야기 ]
불안한 희망 ‘일의 미래’
태평양 연안의 밴쿠버와 시애틀
윤지용(2020-07-07 13:07:36)

윤지용의 두 도시 이야기 | 태평양 연안의 밴쿠버와 시애틀

불안한 희망 ‘일의 미래’

글 윤지용 편집위원



캐나다의 밴쿠버와 미국의 시애틀은 태평양 연안의 도시들이다. 캐나다의 남서쪽에 있는 밴쿠버와 미국의 북서쪽에 있는 시애틀은 약 230km 떨어져 있고 자동차로 세 시간쯤 걸린다. 우리나라의 서울에서 전주까지의 거리인데 광활한 북미대륙에서 이 정도면 매우 가까운 편이다. 비록 중간에 국경을 넘는 출입국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쉽게 왕복할 수 있었다. 


이민자들의 도시 밴쿠버
태평양을 끼고 있는 밴쿠버의 날씨는 해양성 기후답게 온화한 편인데 비가 많이 와서 ‘레인쿠버’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내가 갔던 12월 하순에도 춥지 않은 대신 매일 비가 왔다. 도시의 이름 밴쿠버는 18세기에 이 일대를 탐사했던 영국인 조지 밴쿠버(George Vancouver)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광역도시 밴쿠버(Metro Vancouver) 안에는  밴쿠버 시(Vancouver City)를 비롯한 여러 개의 작은 행정구역들이 있다. 광역 밴쿠버의 인구는 약 240만 명 정도인데 그 중 40% 정도가 인도, 중국 등 아시아계라고 한다. 우리나라 교포들도 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가히 이민자들의 도시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북미대륙 전체가 이민자들의 땅이다.이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백인 이민자들에게 밀려나 ‘소수인종’이 되어버렸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여행자거리는 ‘개스타운(Gastown)’이다. 밴쿠버의 초기 정착민이자 최초의 술집 주인이었다는 개시 잭(Gassy Jack)의 이름을 땄다. 이 개시 잭의 술집에 선원들과 벌목공들이 몰려들면서 이 지역이 상업중심지로 성장했다고 한다. 개스타운의 명물은 증기시계(Steam Clock)다.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시계인데 매시 정각과 30분마다 증기를 내뿜으며 음악소리를 낸다. 그래서 이 시간이 되면 많은 여행자들이 카메라나 휴대전화를 들고 기다린다. 사실 이 시계는 오래된 역사유물이 아니고 1977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심에서 가까운 스탠리파크는 둘레가 10km가 넘는 거대한 도시공원이다. 울창한 숲과 산책로, 자전거도로에 대규모 수족관까지 갖추고 있다. 스탠리파크 남쪽의 잉글리시 베이 해변은 바다로 지는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밴쿠버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삼사십 분쯤 가면 나오는 캐필라노 현수교(Capilano Suspension Bridge)도 들러볼만한 곳이다. 까마득한 높이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140m 길이의 현수교다. 이 다리를 건너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수십 미터 높이의 아름드리 나무들로 울창한 숲속을 거니는 것도 좋다.


사실 이런 관광명소들보다 인상 깊었던 곳은 밴쿠버 공공도서관과 그랜빌 아일랜드였다. 주정부가 1억 달러를 들여 지었다는 공공도서관은 장서가 130만 권이 넘는다는데 외관부터 범상치 않다.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의 모양을 본떴다. 겉모양만 특이한 것이 아니고 내부 공간도 우리가 알고 있는 도서관들과 사뭇 다르다. 마치 카페처럼 은은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열람실들에서 시민들이 자유분방하게 책을 읽거나 비치된 PC들을 이용한다. 그랜빌 아일랜드(Granville Island)는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나가는 다리 아래에 있는 작은 섬이다. 옛날에는 제재소들과 공장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오래 전에 공장들이 떠나고 버려져 도시의 흉물이 됐었다고 한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의욕적으로 도시재생사업을 벌여 지금은 해마다 1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재래시장인 퍼블릭마켓과 해산물 레스토랑들, 디자인 전문대학,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들이 있다. 아직 남아 있는 콘크리트공장의 사일로도 아기자기한 색으로 칠해져 마치 예술적인 조형물처럼 보인다.



인디언 추장의 이름 시애틀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주인공이었던 영화로 유명한 도시 시애틀은 미국 워싱턴 주의 주도(州都)이다. 시애틀은 원래 이 지역의 주인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인 수쿼미시족 추장의 이름이라고 한다. 19세기 중반에 이 지역을 강제로 매입하려고 온 미국 대통령의 사절단에게 시애틀 추장이 했다는 연설은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어떻게 하늘을 사고팔 수 있으며, 대지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다는 말인가? 공기의 신선함과 물의 반짝임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우리가 땅을 팔지 않는다면 그대들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중략) 언젠가 마지막 황색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지라도 산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시애틀의 랜드마크인 뾰족한 고층건물 ‘스페이스 니들’과 ‘별다방 본점’ 같은 유명한 곳들이 많지만, 내가 끌렸던 곳은 ‘껌벽(Gum Wall)’이었다. 재래시장인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뒷골목인 포스트 앨리(Post Alley)에 있는 껌벽은 말 그대로 수십만 개의 껌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벽이다. 1990년대 초반에 이곳에 있는 극장에 공연을 보러온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벽에 껌을 붙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중에 너도나도 따라하다 보니 벽이 온통 껌으로 뒤덮였다고 한다. 2015년에 시애틀 시당국이 ‘도시 미관과 위생’을 이유로 껌들을 모조리 떼어내고 이 벽을 깨끗이 청소했는데 얼마 못 가서 벽은 더 많은 껌들로 덮였다고 한다. 대중은 이렇게 위대하고 집요하다.



시애틀에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아마존의 본사가 있다. 아마존의 작년 매출이 2,805억 달러, 우리 돈으로 330조원이다. 이런 공룡 때문에 오프라인 유통업의 소매업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아마존은 좋은 기업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아마존은 쇠락해가는 공업도시 시애틀에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2010년에 아마존이 이사와서 사옥을 짓고 자리 잡은 곳은 시애틀의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다. 아마존은 그 일대에 수십 채의 건물을 짓고 도시 인프라에 투자했다. 직접 고용 일자리가 4만 개이고 경제효과가 엄청나서 시애틀은 뉴욕보다 부자 도시가 됐다고 한다.


듣던 대로 아마존 사옥 옆에 '바나나 스탠드'가 있었다. 공짜로 바나나를 나눠준다. 좌판 옆에는 “A banana a day keeps the doctor away. Take one. Not just for Amazonians, but for anyone in the community.(하루에 바나나 한 개씩 먹으면 건강해집니다. 가져가세요. 아마존 직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 공짜 바나나를 먹기 위해 찾아오는 시민들 때문에 카페들이 들어서고 인근 상권이 활성화된 것을 ‘바나나 효과’라고 한단다. 아마존 사옥 앞에는 ‘아마존 스피어스(Amazon Spheres)’도 있다. 세 개의 거대한 반구형(半球形) 유리 돔을 붙여놓은 건물이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비롯해서 전세계의 희귀 식물종들을 모아 기르는 식물원인데, 시애틀의 새로운 명물로 각광받고 있다.



기관사 없는 열차, 점원 없는 슈퍼마켓
밴쿠버와 시애틀은 둘 다 태평양 연안의 도시이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땅이었다는 점 말고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두 도시 모두 무인화의 시험장이다. 밴쿠버 시내의 주된 대중교통수단인 스카이트레인은 일종의 경전철인데 이름에 어울리게 주로 고가철도로 다니고 도심 구간에서는 지면 위의 철로로 다닌다. 엑스포 라인, 밀레니엄 라인, 캐나다 라인 등 3개의 노선으로 도시 곳곳을 연결해서 무척 편리하다. 열차의 차량들을 우리나라의 기업이 만들었다는데, 기관사가 없는 무인열차다. 이미 2006년부터 이런 무인운행 시스템이었다고 한다.


시애틀 시내의 아마존 본사 건물에는 ‘아마존 고(Amazon Go)’라는 무인편의점이 있다. 2016년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아마존 직원들을 위한 일종의 구내매점이었는데, 2018년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 건물 말고도 시애틀 시내에 한 곳이 더 있고, 미국 전역에 16개의 매장이 있다. 고객들은 미리 자신의 휴대전화에 전용 앱을 설치하고 매장에 들어가면 된다. 매장 안 곳곳에 촘촘하게 설치돼 있는 카메라들과 진열대의 센서들이 고객이 집어든 상품을 실시간으로 파악하여 집계한다. 그렇게 집어든 물건들을 가지고 그냥 나오기만 하면 된다. 매장을 나오자 몇 초 안 지나서 앱에 등록해둔 신용카드로 결제됐다는 알림 메시지가 왔다. 몹시 신기한 경험이었다.


올해 2월에는 시애틀 시내에 ‘아마존 고 식료품점(Amazon Go Grocery store)’이 문을 열었다. 기존의 아마존 고처럼 무인매장인데, 1만400평방피트(약 300평) 규모의 대규모 식품매장이다. 채소, 육류, 해물, 베이커리, 유제품, 간편식, 주류 등 5천여 종의 식품을 판매한다. 당연히 아마존은 이런 무인매장을 늘리면서 오프라인 유통업 분야를 잠식해나갈 것이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기관사 없는 열차와 점원 없는 슈퍼마켓이 우리의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일반도로에도 자율주행 자동차가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몇 년 안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인드론 택시도 상용화된다고 한다. 신기하고 편리한 세상이지만, 두려운 미래이기도 하다. 사람 없이도 굴러가는 세상이 되면 일자리도 없어지는 게 당연하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까?


마냥 암담하기만 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19세기 초반 산업혁명 당시에 영국에서 ‘러다이트 운동(Luddite)’이 있었다. 기계화에 밀려나 일자리를 잃고 생존의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이 방적공장의 기계들을 파괴하며 저항했던 일종의 폭동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제조업 이외의 다양한 산업분야들이 생겨났고 더 많은 일자리들과 사회보장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자리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제도’ 역시 단순한 복지시혜가 아니다. 일자리가 없어지는 사회에서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최소한의 구매력을 보장하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한 대안이다. 그래도 어쨌든, ‘일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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