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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⑧
스물아홉 살, 다시 늦깎이 대학생이 되다
임안자(2020-08-12 09:48:16)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⑧


스물아홉 살, 다시 늦깎이 대학생이 되다
임안자 영화평론가


이비인후과 수술실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가장 많이 관심을 쏟은 데는 독일어였다. 과거 1년 동안 병동의 수간호사 밑에서 독어 때문에 겪어야 했던 뼈아픈 경험도 한몫했지만 현실적으로 스위스에서 계속 일을 하려면 하루빨리 언어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다는 결심이 그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근무가 끝나면 이른 저녁을 주로 언어 학원에서 보낼 정도로 독어에 열중했다. 독일어와 한참 씨름을 하던 1970년 초겨울에 나는 한 책방에서 금발의 스위스 남자를 또 만났다. 한국으로 가기 전 그를 길에서 잠깐 만났으나 그 뒤 잊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 아주 반가워했다.


그날 우리는 어느 커피집에서 영어와 독어를 섞어가며 두어 시간 한국과 스위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신학을 그만두고 프리부룩 대학에서 새로 시작한 신문학에 대해 말을 이어 가다가 언뜻 나에게 “혹시 신문학에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 언젠가 내가 지나가는 말로 스위스에서 문학을 배우고 싶다고 했던 말을 기억한 듯했는데, 그의 물음에 귀가 번쩍 트인 내가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그는 나의 열띤 반응이 재미있는지 웃으면서 대학 쪽에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 달 뒤 신문학과에서 인터뷰가 있을 테니 필요한 재료를 미리 준비하라”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인터뷰 예약이 있던 날 나는 잔뜩 긴장하고 스위스 친구를 따라 기차로 프리부룩으로 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두 시쯤에 신문학 연구소장과 그의 사무실에서 면담을 했다.


그는 내가 제출한 간호학교 졸업장과 이력서 그리고 1968년에 시카고의 쿡 카운티 시립학교(들) 감독관(COOK COUNTY SUPERINTENDENT of SCHOOLS)으로부터 취득한 <고등학교 동등 증명서>(High School Equivalency Certificate)를 하나하나 자세히 점검한 뒤에 20분 동안 영어(독어 부족 때문에)로 질문을 했다. 그날의 시험 결과는 두 주가 지나서 우편으로 받았는데, 편지 안에는 입학시험 합격확인서가 들어있었다. 그걸 읽는 순간의 기쁨을 여기에 다 표현할 수 없지만 하얀 종이에 쓰인 몇 줄 안 되는 글에서 나는 어렴풋이나마 내 삶에 새로운 길이 트이고 있음을 감지했다. 앞에서 말한 ‘고등학교 동등 증명서’는 내가 일리노이대학 폐병전문병원에서 일하던 시기에 혹시 대학에 들어갈 기회가 오면 쓰려고 쿡 카운티 시청에서 주관하는 정규적인 시험에 참가하여 합격함으로써 받은 것이었다.


결국 나는 스물아홉 살에,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시집을 가야 할 나이에 대학생이 된 셈인데,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오랜 꿈이 드디어 이뤄졌기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함을 제대로 즐길 겨를도 없이 곧이어 학비 문제에 부닥트렸다. 학비를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문제점이었는데, 그 당시 나에겐 2만 달러가 있었다. 그 돈은 내가 시카고 시절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저축해둔 것으로, 그때까지 손대지 않고 모두 스위스 은행에 보관하고 있었다. 어림잡아 대학생활 2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당장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 끝에 나는 바젤시립병원의 간호원장을 찾아갔다. 내가 한국에 머물고 있을 때 나를 수술실로 오게끔 도와주었던 그녀는 내가 대학에 가게 되어 학비 때문에 여름방학 동안 3개월을 수술실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학에 들어간다니 축하한다. 실은 해마다 여름만 되면 간호사들의 휴가가 겹쳐서 수술실에 손이 모자랐었는데 당신이 여름에 몇 개월 일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라”며 더 물어볼 것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확답을 주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대답은 학비에 대한 문제를 대번에 풀어줄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두어 달 사이에 대학에 들고 학자금을 충당할 수 있는 일자리까지 찾게 됐는데, 내가 스위스에 들어온 지 2년도 채 못 돼서 바젤도 아닌 프리부룩에서 신문학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스위스 남자 친구와 간호원장의 개별적인 도움으로 가능했다. 간호원장과의 합의에 따라 나는 여름만 되면 바젤시립병원에서 일하고 3개월 동안 벌은 월급으로 대학생활을 이어갔다. 다행히 수업료는 한 학기에 250프랑을 넘지 않았고 대학생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얻은 단칸방의 월세도 150프랑밖에 들지 않아서 내가 번 돈으로 몇 년을 지탱할 수 있었다.



프리부룩 대학 4년(1971-1974)
프리부룩 대학은 중세기에 세워진 제수이트 교단의 상 미셀 컬리지를 기반으로 시작됐으며 처음에는 가톨릭 체제의 교육기관으로 운영되다가 1889년에 일반대학으로 바뀌었다. 프리부룩은 고작 인구 3만 4천 명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1만 명에 달하는 대학생들이 그곳에 공존함으로써 ‘대학의 도시’로 한층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곳 대학의 특이함은 전통적으로 모든 학부에 불어와 독어가 따로따로 나눠져 있다는 점인데, 그 때문에 세계에서 두 개의 국어를 병용하는 유일한 대학으로 꼽히고 있다. 참고로, 스위스는 적잖이 네 개 언어를 국어로 쓰는 나라다. 바로 독어(63.5%), 불어(22.5%), 이태리어(8.1%), 래토로만어(0.5%)인데 래토로만어는 1938년에 정부에서 시행한 국민투표의 결과에 따라 소수언어가 국어로 승인된 것이다. 스위스는 26개 칸톤(한국의 도 또는 미국의 주)으로 짜인 연방정부 체제인데 네 개 언어 중 독어는 19개 칸톤에서 쓰이고 있다. 그 밖에도 스위스의 복수 언어 실정법은 21세기 들어 다민족으로 구성된 유럽연합이 지향하는 새로운 언어정책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프리부룩 대학에 ‘신문학 연구소’가 들어선 시기는 1966년으로, 본디 설립 목적은 가톨릭 계통의 기자들 양성에 있었으며 언론저널리즘, 언론출판, 언론경영, 언론법, 언론윤리학 등 주로 언론 연구가 중심점이었다. 그러다 1970년에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학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연구학이 새로 설치되면서 ‘저널리즘과 커뮤니케이션 연구소(Institute for Journalism and Communication Studies)’로 이름이 바꿔짐과 동시에 학문의 분야도 넓어졌다.


나는 1971년 4월 초에 첫 학기 등록을 마치고 독어의 신문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본관의 맞은편에 세워진 그다지 크지 않은 연구소의 강의실에는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거의가 남성들이었고 여자는 기껏 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나와 한두 사람을 빼놓고는 대부분 인문학 전공자들로 기자 자격증을 얻기 위해 신문학을 곁들어 배우고 있었다. 스위스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신문학이 뒤늦은 편이어서 70년대 초까지도 신문학 전공의 전문교수가 거의 없었다. 신문학 연구소에서 강의를 맡은 여섯 명의 강사들은 그러나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현장 경험이 풍부한 미디어 전문가들이었다. 강의는 신문,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의 이론과 역사 그리고 매체의 법률을 중점으로 진전되었고 각 분야마다 3개월의 현장 실습이 필수 과목으로 들어있었다.


대학생활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신나고 재밌었다. 항상 일거리로 꽉 차 있던 병원의 일상에 비하여 느긋하고 자유로운 대학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아주 새로운 전문분야를 배우는 게 기뻤다. 나는 어느 강사라 할 것 없이 그들의 강의를 빠짐없이 다 챙겨 들었고 그에 관련된 책도 부지런히 찾아 읽었다. 하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독일어 실력으로 강의 내용을 넉넉히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 동료들의 권고로 독문학과에서 외국 유학생들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씩 무료로 제공하는 과외수업에 참여하고는 그때부터 신문학을 마칠 때까지 과외수업을 계속 병행했다. 바젤에서 다니던 언어 학원과 달리 문법, 회화, 독서 시간으로 나뉘어 빈틈 없이 잘 짜인 과외수업 과정을 거치면서 내 독일어는 스스로 느낄 만큼 빠른 속도로 나아졌다. 그에 힘입어 4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독서 시간의 교재로 선택된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 ‘옛날의 빵’(1955년)을 읽기에 이르렀다. 독어 원문으로 읽은 첫 소설이었는데, 독어 사전을 계속 뒤적거리며 읽었으니 기껏해야 수박 겉핥기였겠지만 그래도 주인공 소년의 배고픈 삶과 마주할 때는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눈물을 글썽거리며 읽은 책이었다. 하인리히 뵐(1917-1985)은 2차 대전 이후 독일 문학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옛날의 빵’은 전쟁으로 가난에 쪼들리던 젊은이의 고달픈 삶을 파헤친 사회현실 주제의 명작이며 뵐은 197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나는 언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독어에 차츰 익숙해질 1973년 이른 여름에 우연히 강의실 앞의 벽에 붙여진 공고에 눈이 갔다. 내용인즉 ‘1973년 7월-9월까지 프리부룩 대학에서 불어와 독어의 집중적인 언어 강습이 무료로 열린다’였는데, 알고 보니 가을 학기에 스위스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유학생들을 위해 해마다 스위스 정부에서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독어와 불어 코스였다. 사실은 프리부룩에서 살면서부터 불어를 배우고 싶은 생각이 꿀떡 같았지만 독어에 밀려 참고 있던 차에 공고를 읽고는 이때다! 싶어 바로 대학 사무실에 등록을 하고 간호원장에게도 염치 불구하고 불어 코스를 꼭 밟고 싶은데 일을 못 해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고맙게도 그녀의 대답은 ‘괜찮다’였다. 그리하여 신문학 봄 학기가 끝나자마자 나는 열다섯 명의 젊은 유학생들 틈에 끼어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하루 다섯 시간 불어를 배우고 주말에도 숙제가 많아서 정신없이 3개월을 훌쩍 보냈다.



내가 참여한 초보자 코스에는 남아메리카와 동유럽 출신들이 많았고 나머지는 아프리카, 이란, 아일랜드, 독일, 한국인이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면 짬짬이 커피집에 모여 서툴기 짝이 없는 불어로 떠들어 댔고 저녁 시간에는 자주 내 좁은 방에서 기타를 치는 브라질 친구의 음악에 따라 노래를 부르며 즐겼다. 그리고 불어 코스를 통해 나는 베네수엘라에서 온 이리스 라미레즈와 아주 친한 사이가 됐고 그때의 우정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카라카스 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이리스는 군 장교 출신으로 성격이 아주 엄격한 ‘무서운 아버지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위스로 도망’ 온 친구였다. 도망의 배경을 말하면 아버지가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베네수엘라의 유명 석유회사 아들과의 결혼을 선언해버렸던 것이다. 뒤늦게 그걸 알게 된 이리스는 어머니가 도와줘 가까스로 집을 빠져나와 스위스로 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불어 코스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그리하여 외교관의 길을 원했던 이리스와 바티칸의 신학 학생으로 그 해 가을에 신부가 될 참이었던 독일 청년 후베르트는 다음해 가을에 베네수엘라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아들도 하나 얻었는데 아쉽게도 몇 년이 지나서 둘은 헤어지고 이리스는 베네수엘라 대사관의 일등 서기로 스위스에 다시 왔었다. 그런 사이 나는 여름 코스로 만족할 수가 없어서 겨울 학기에 중등학교 선생을 양성하는 대학 소속의 불어과에 들어가 4학기 동안 신문학과 독어를 배우면서 불어 공부를 계속했고 신문학을 끝낸 뒤에는 거의 바닥이 난 생활비를 다시 채우기 위해 프리부룩의 시립병원 외과병동에서 6개월 일하면서 불어를 익혔다.                                               

 9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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