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 대사, 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으뜸은 무엇일까요. 사랑? 믿음? 소망? 그리고 또 …. 사실 이런 질문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본질적으로 경중의 차이가 없는 데다, 모든 가르침이 상호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예수’의 고민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는 차원에서 어리석은 질문을 하나 던져 봤습니다.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인간 예수’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가장 간절한 바람은 평화가 아니었을까, 라고 추측해 봅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이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평화를 이야기한 이유는 그것이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없는 상태에서도 사랑이나 믿음은 가능합니다. 혹독한 박해 시절에도 사랑과 믿음이 있었고, 그것은 평화 시절보다 더 순수하고 더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 믿음은 큰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루 말할 할 없는, 처량하고 처연한 사랑이었고 믿음이었습니다. 로마 박해 시절,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해진 악명 높은 맹수형이 그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카발로비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쿼바디스(2001년 리메이크)’가 맹수형의 실상을 실감 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죄인(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부르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뛰쳐나온 굶주린 사자들이 이들을 마구잡이로 뜯어먹습니다. 사자 한 마리가 엄마 품에 안겨있는 갓난아기를 삼킵니다. 비명 소리가 귀를 찢습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는 흐뭇한 표정을 짓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매운 ‘위대한’ 로마 시민들은 네로의 비위를 맞춰주기라도 하듯 환호합니다. 이른바 로마의 맹수형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사건도 맹수형 못지않게 잔인하고 처절했습니다. 전주 전동성당에 모셔진 윤지충(바오로)이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신해박해(1791년) 때 윤지충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때에도! 서울의 절두산 성지는 박해의 참상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래 이름은 잠두봉이었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수백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머리가 잘려 나가는 집단 처형을 당한 후 붙여진 이름입니다. 잘린 머리가 절두산 바위 넘어 한강으로 던져졌다고 하니, 절두산의 암갈색 바위가 피비린내 나는 참수형의 현장을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평화 속에서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며 살기를 소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평화를 묵상할 때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속담을 떠올리곤 합니다. 여러 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가 임종할 때 그들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당부 말은 무엇일까요. “돈 많이 벌어 부자 되거라”“승진 빨리해서 출세해라” 이런 말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는 자녀들의 손을 꼭 잡고 “사이좋게 오순도순 살아야 한다!”라고 당부할 것입니다. 형제끼리 싸우지 말고, 오순도순 평화롭게 지내라는 유언이겠지요.
세상에는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역사와 문화가 다른 수많은 하느님 자녀가 살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는 이들을 대표하고 있지요.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결정적인 순간마다 평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수난 후 부활하시어 제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첫 마디가 ‘평화’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당시 상황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실감 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목활동의 지침으로도 평화를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평화가 무엇일까요? 너무 거창하게,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오순도순 사는 것 아닐까요? 바로 형제애(fraternity)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취임 후 발표한 첫 평화메시지(2014년)에서 형제애를 강조하셨습니다. “형제애는 인간성의 핵심이며 평화의 기초이다.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분명한 자각이야말로 서로를 존중하며 친형과 친동생으로 혹은 친누이로 대하도록 한다.”
평화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평화가 가장 중요합니다. 평화 없이 되는 게 있을까요? 사랑이나 믿음은 기본적으로 당사자 개인의 문제입니다. 본인 스스로 마음먹고, 실천하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상대방이 있는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 대화해야 하고, 설득해야 가능합니다.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그토록 간절하게 평화를 이야기했을까요. 역설적으로 평화 만들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교황은 ‘평화의 사도’입니다. 교황은 매년 1월 1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세계만방에 평화의 메시지를 반포하는 것으로 새해 업무를 시작합니다. 1월 1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세계평화의 날'입니다. 새해 첫날의 평화 미사는 바오로 6세 교황이 1968년 1월 1일을 ‘세계평화의 날’로 선포한 이후 교황청의 관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