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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 | 연재 [벗에게 시간을 묻다]
옹기장이 이현배와 시인 박형진이 주고받는 손편지 21
박형진, 이현배(2022-10-12 13:37:36)

벗에게 시간을 묻다

옹기장이 이현배와 시인 박형진이 주고받는 손편지 21



손내골 현배 선생님!


명절을 잘 보내시었소?

명절이 주는 갖가지 즐거움들과 명절 뒤끝이 주는 갖가지 쓸쓸한 마음들을 서로 쌤쌤하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으니 명절도 결국 날마다 같은 날의 하나 아니겠소? 이상한 셈법인가요? 명절이란 것이 지나고 보면 늘 아쉬움이 더 많아서이겠는데 이번 추석 명절도 다르지는 않는지 저는 싱숭생숭 들썩였던 마음이 잘 잡혀주질 않는구랴. 그렇다고 해서 명절을 얼마나 거하게 보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요, 얼마나 즐거웠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명절 뒤에 올 이런 반동을 생각하며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였으나…. 상실감이 더 크니 명절 유감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습니다.


어느 글에도 쓴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래서 저는 명절이 오기 전까지의 그 몇 며칠을 좋아합니다. 추석으로 말하면 벌초가 한참 시작되는 일주일 전쯤부터. 먼 곳의 벌초는 그 전전부터 짬을 내서 다녀오므로 그때부터. 어느 때던 벌초가 시작되면 추석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됩니다. 마음이 벌써 어떤 기대 같은 걸로 나도 모르게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니까요. 벌초가 끝나면 논밭의 일들을 미리미리 해두는 것도 명절에 일 걱정하지 않으려기 때문이지요. 부지런하고 깔끔한 사람은 머리 깎고 목욕하듯 논 밭둑의 풀들까지도 할 수 있으면 가지런하고 깨끗이 베어 줍디다.


그러고 나면 이제 집 안 청소! 버리기 아까워 쌓아두기만 하고 쓰지는 않던 물건들을 우선 정리해서 답답하고 너저분했던 숨통을 좀 트이게 해야죠. 사람 사는 것이 언제나 그러했지만 손대지 않았던 안엣것들을 치우다 보면 참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서 하던 것을 멈추고 우두커니 앉아있기 일쑤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맘을 먹고 그때는 그러했는지 아주 오래전의 물건들이나 멈춰있는 어떤 흔적들을 발견하면 지금의 내 모습과 변화를 느끼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지요. 집안 살림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은 어쨌던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나 방식을 정리하는 거라서 쉽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비워내야 더 이롭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저는 당연하게도 집주변을 정리하고 청소합니다. 제집 주변이 다 맨 흙땅인지라 마당이나 뒤안의 풀을 뽑고 처마 밑에 굴러다니는 살림 나부랑이들도 좀 정리 하고 나면 내쳐 창고로 쓰는 비닐하우스를 치우죠. 창고에 있는 것들은 잘만 놔두면 언젠가 한 번은 긴하게 쓰겠지만 그러다 보면 쌓이는 속도가 더 빨라서 이곳도 약간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집안팎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이 몸은 조금 덜 고단할지 모르나 마음은 딱딱 정해진 논밭의 일보다 더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더군요.


이제 제가 생각하는 하이라이트 장보기! 저야 막내인지라 큰집에 가서 차례를 지내므로 장보기에서는 조금 더 자유스럽게 사흘 전부터 아내랑 의논한 대로 (대부분 아내의 주장이지만) 장을 보고 선물을 고릅니다. 장이란 게 결국 애들이 좋아하는 엄마표 음식을 만들기 위한 식재료이지 뭐 특별한 게 없지만서도요. 이제부터 집안에서는 평소와는 조금 색다른 음식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겠지요?


제가 생각하는 명절은 여기까지입니다. 명절이라고 해서 왜 걱정이 없겠습니까만 주어진 조건 속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아예 잊으려 합니다. 그래야 하루가 다르게 차오르는 달이나마 밝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열이틀, 열사흘, 열나흘의 달을 가만히 혼자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서 밤이 깊고 또 그 속으론 많은 생각들이 지나갑니다. 올 추석이야 코로나 거리두기가 풀려서 객지 생활하는 가족들이 집에 돌아오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작년 재작년엔 보지도 못했었죠. 그때의 그 기억들이 지금도 홀로 명절을 보낼 수밖에 없는, 설사 자손들이 다녀간다 하더라도 홀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그것과 겹치면서 어떤 동질성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추석날 차례를 지내고 조카들과 함께 성묘를 다녀온 뒤 느즈막하게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명절 쇠러왔음직한 사람들을 찾아보았는데 상상외로 그 수가 없다시피해서 놀랬습니다. 익히 짐작한 일이지만 코로나와는 상관없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그 어떤 물리적 경계가 작동하고 있는 탓이지요. 그래서 저의 추석은 어떤 기대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부푸는 열나흘 자정까지만일 뿐입니다. 차면 기우는 것을 싫다고 한들 올해도 예외 없이 찼다가 기울어 갑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 마음이 지어내는 것들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말해버릴 수만은 없는 공동화된 농촌의 모습들! 이런 날이 얼마나 지나야 기울지 않는 모습의 나쁜 이별 없는 세상이 올런지요. 그런 날을 기다리며 마음을 추스르려고 이제 조금씩 몸 쓰는 일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또 내내 건강하고 안녕한 날들을 보내십시오. 


2022.9.20  박형진 드림


다스리다


몸살 삼일,

낮게 드리운 하늘만큼이나

몸이 무겁다

추석 앞두고

이런저런 걱정에 놀리다가

몸 쓰는 일이라도 해둘 요량이었는데

무리를 했나보다

누웠다 앉았다가

하 답답하여 밖에 나오니

나뭇잎 하나 까닥하지 않고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이럴 땐 차라리

한바탕 쏟아져 버리면 나을 텐데

잔뜩 덮누르기만 하는 구름들,

토방을 내려서니

다리가 휘청한다

그러나 사흘 동안

다른 것을 입에넣지 않은 것은

내 안에서

화농처럼 터질 듯 터질 듯한

그 무엇과 맞닥뜨리고 싶어서였을까

무거운 공기를 가르듯

홰를 치며 우는 낮닭의 소리가

오늘따라 장하게 느껴진다





모항 박형진 시인께


저는 소위 빨간 글자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추석명절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친가와 처가 성묘를 다녀온 것이 뿌듯합니다. 당신들께서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추억하며 올려드린 것이 좋았습니다. 언제 쓴 말인데 “절/ 절 받으세요/ 저를 받으세요”했던 그 말처럼 ‘저를 받으세요’ 할 수 있기를 다시 기원했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작은도서관에서 빌린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정은정지음, 한티재출판)을 명절연휴에 다 보고 싶었지만 역시 몇 장 이상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다시 책을 사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저자분과의 소통으로 그야말로 한가위의 보름달처럼 뽀땃했습니다. 


그동안 농촌사회학자라고 하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대한민국 치킨전]과 [마을 8]을 정독하면서 이 젊은 학자의 깊은 사유와 실천적인 삶에 경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의 뒷표지에 있는 말입니다. 


“인간이란 실체를 정의하자면 살아오면서 먹은 음식의 총체이다. 음식은 오로지 물리적 맛과 영양, 칼로리의 총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개개의 모든 음식에는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자연의 변천까지 망라되어 있고, 여기에 개인의 기억과 사연까지 깃들어 있다. 포도가 보통의 과일이 아니라 어느 한 여인과 그 가족들의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그 무엇이었던 것처럼. 하여 오늘 우리의 입으로 쓸려 들어가는 지상의 모든 음식들이 무겁고 복잡하며 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저는 음식을 ‘농업의 가장 완성된 형태’로 놓고 궁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은정선생이 음식들의 ‘무겁고, 복잡‘에 주목했던 것처럼 농촌사회 또한 ’무겁고, 복잡함‘ 그대로 이기에 ‘농촌사회학’에 혹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제 여건에서 그동안 접한 농촌사회학은 농촌을 계몽의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군부독재의 새마을 운동이 그랬고 근래 농촌재구성의 마을만들기, 사회적경제 마저도 다 그랬습니다. 그래 농촌사회학이라는 것이 본래 ‘농촌을 대상화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가 정은정선생을 만나 매우 기뻤습니다.   


도시의 숨막히는 고통이 농촌의 고통에서 출발했기에, 농촌을 돌봐야 아픈 도시를 다독일 수 있다는 비판적, 공감적 진단들과 골고루 갖춘 밥상을 함께 받는 세상을 위해 차갑고 서러운 타인의 밥상을 살펴보자는 농촌사회학적 제안이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TV로 [자연의 철학자들] 박선생님편을 봤습니다. 이렇게 글로 접하다가 박선생님의 삶의 철학을 영상으로까지 보게 되어 좋았습니다. 손수 지으신 집과 모항의 바다, 지푸라기를 다루시는 솜씨, 얌전한 농사. 저와는 생판 다른 살림솜씨에 ‘저걸 배워야 할 텐데’ ‘저걸 배워야 할 텐데’ 했는데 과연 배워질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역일로 ‘하늘이 내렸다’ ‘산이 키웠다’라는 말을 내놨습니다. 그 말을 몸차원에서 구현하고자 잦아진 두통을 다스릴겸 ‘머리는 차갑게, 뱃속은 따숩게(수승화강水昇火降)을 위한 작은 행위를 시작하였습니다. 


온통 거짓말 같은 세상이라 덥다가 하룻밤 사이에 추워진 날씨가 또 거짓말 같은데 태산같은 가을걷이로 몸 상하는 일 없이 강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2. 09. 20 

옹기장이 이현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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