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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 | 연재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의 비극
이휘현 KBS전주 PD(2022-10-12 14:04:22)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10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의 비극


글 이휘현 KBS전주 PD






이탈리아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는 어쩌면 영화 자체보다 영화음악이 더 유명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루이스 바칼로프의 아름다운 음표가 반도네온 선율을 타고 귀를 자극하면, 우리는 어느 새 자전거를 몰고 저 푸른 바다 옆 해안 절벽 위를 내달리는 깡마른 우체부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내용은 흐릿한데, 몇몇 이미지와 사운드트랙만은 선명하다. 좋은 영화음악이 평범한 작품을 클래식 무비로 끌어올린 흔치않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 <일 포스티노>는 원작소설이 있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작품이다.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이 사실을 모른다. 한국에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도 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12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이슬라 네그라’라는 곳이다(스페인어로 ’검은 섬‘을 뜻하는 거라고 한다).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고향 마을이라는 유명세 덕분에 한적했던 이 시골마을은 이제 제법 이름난 관광명소가 되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자 하는 나의 자그마한(?) 소망이 가슴 한켠에 오래전부터 자라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로 각색한 <일 포스티노>는 이야기 배경을 이슬라 네그라에서 이탈리아의 어느 궁벽한 섬으로 바꿨다. 공간이 변하다 보니(무려 중남미에서 유럽으로의 대륙 이동이 이뤄진 것이다!) 이야기의 톤도 꽤 달라졌다. 시와 사랑을 둘러싼 웃음과 해학으로 시작해 구슬픈 비극으로 추락하는 원작소설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영화는 초반의 낭만주의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나름의 따스한 정서를 끝까지 고수한다. 소설의 주요 모티프를 따오되,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의 절반은 차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과감하게 버리는 전략을 영화는 택한 것이다. 그게 대중성을 고려한 차선책이었다 해도, 영화를 먼저 보고 나중에 원작소설을 읽게 된 나로서는 묘한 배신감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소설에는 영화가 이뤄내지 못한(혹은 외면한) ‘시대의 비극’이라는 거대한 예술적 성취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 <일 포스티노>도 나쁘지 않은 작품이지만, 그보다 훨씬 우월한 퀄리티의 원작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소설의 얼개는 비교적 단순하다. 다소 게으르나 착한 천성을 가진 청년 백수 마리오가 우연히 이슬라 네그라 우체국의 채용공고를 보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가 맡은 유일한 우편물 수취인은 바로 칠레가 배출한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 하지만 유명인사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의 감정은 없던 마리오가 동네 선술집 과부의 딸 베아트리스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육감적 몸매의 어린 처녀를 향한 열정이 활활 타오르는 혈기왕성 마리오. 하지만 멀쩡한 몸뚱어리 빼고 뭐하나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청년이 아름다운 베아트리스의 마음을 얻기는 요원한 일. 무자본 투자가 가능한 세치 혀 놀림으로 연애 사업에 뛰어들려는 마리오가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매일 우편물을 배달해주는 연애시의 대가 네루다 말고 어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결국 삼고초려 끝에 위대한 시인으로부터 ‘시적 은유’라 일컬어지는 절대 무공의 연애 비법을 전수받기에 이르는데….

‘메타포’라는 매개체를 통해 싹트는 마리오와 네루다 사이의 세대와 계급을 초월한 특별한 우정, 그리고 베아트리스와의 극적인 연애 성사가 소설의 중반까지 독자들의 낭만적 심상을 고조시킨다. 훗날 마리오의 장모가 되는 베아트리스의 엄마가 귀여운 빌런으로 등장해 나름의 존재감을 뽐내는데, 독자들은 소설 페이지를 넘기며 이 사랑스런 캐릭터 때문에 수없이 웃음을 머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환상적이고 가슴 설레는 일인지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잘 드러내고 있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이 대목까지만 원작과 동행했다.


소설은 중반 이후 ‘칠레 현대사’의 먹구름이 서서히 드리우며 전혀 다른 질감의 정서를 전달한다. 격동의 역사 한복판에 있던 시인 네루다의 운명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길을 따라 진행되고, 마리오를 비롯한 소설 속 이슬라 네그라 주민들은 그 역사의 맥락에 곁가지를 펼치며 비극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1969년 파블로 네루다의 칠레 대통령 후보 추대,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불세출 인물의 출현, 그리고 그해 진보대연합을 이뤄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탄생시킨 사회주의 정부, 1971년 파블로 네루다의 노벨문학상 소식 등이 거센 파도처럼 독자들을 칠레 현대사 현장으로 몰아간다. 베아트리스와 나누는 마리오의 사랑이 뜨거워지듯 칠레는 혁명의 열기로 달아오른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마리오의 열망 또한 커간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의 사회주의 실험은 곧 수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진보 진영이 사분오열하고 물류가 마비되어 경제난이 심화되자 여론이 뒤숭숭해진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파의 반격이 시작되는데, 이런 어수선한 시절의 끝자락에 피노체트 장군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다(1973년 9월).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칠레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기관총을 들고 대통령궁에서 끝까지 항전한다. 하지만 미국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고 중무장한 피노체트 군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대통령이 쓰러진 후 칠레 땅 전역이 피로 물든다. 아옌데를 지지했던 이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슬라 네그라도 예외는 아니다. 시인 네루다는 절망과 탄식 속에 숨을 거두고,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간다.

마리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소설은 더 이상의 서술이 없다. 하지만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직후 수많은 민간인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학살당한 역사 기록은 한없이 순박했던 주인공의 슬픈 운명을 짐작케 한다. 결국 시인이 되지 못한 마리오….

칠레 언론인이자 작가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이 중편 분량의 소설을 쓰는데 14년이라는 긴 시간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그 공력이 길지 않은 소설에서 엄청난 슬픔의 에너지로 쏟아져 나온다. 독서의 시간은 짧지만, 책장을 덮은 후의 여운이 깊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칠레와 대한한국 현대사가 묘하게도 겹친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우리가 먹먹한 슬픔에 젖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한반도의 20세기 또한 수많은 마리오 그리고 네루다들이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비극의 풍경으로 펼쳐져있다. 민주주의를 열망한 칠레의 수많은 시민들이 마주해야 했던 절망과 탄식처럼, 우리에게도 ‘서정시를 쉽사리 쓸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어느덧 우리는 그 시절을 잊고 산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이 자꾸 내 머릿속을 맴돈다. 과연, 지금의 우리는, 맘 편히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몇 년 만에 다시 펼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속 이슬라 네그라 군상들의 슬픈 운명이 예전보다 더 깊게 내 폐부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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