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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 | 연재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집 나간 정치를 찾습니다
남재희 회고록들
이휘현 KBS전주 PD(2023-01-15 01:25:22)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13 남재희 회고록'들'

집 나간 ‘정치’를 찾습니다


글 이휘현 KBS전주 PD




정치 얘기만 나오면 주변에서 한숨이다. 욕설도 간간이 섞인다. 정치 뉴스를 보다가 소화 불량에 짜증마저 치솟는다고 토로한다. 다들 세상에서 제일 나쁘고 한심한 놈들만 모아 놓은 듯, 정치판을 논한다.

이러한 반응에 나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한국 정치는 삼류라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원래 정치는 삼류의 영역이 아니던가? 한국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정치가 다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치를 두고 고매한 도덕성을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다. 그건 유토피아에나 존재할 비현실적 정치 관념이다. 

나는 현실 정치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는 와중에 다양한 정치 테크닉들이 구사된다. 그중 가장 이상적인 기술은 합의일 것이다.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기브 앤드 테이크. 때로는 협박과 일방적 밀어붙이기도 존재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정치의 현실적 측면을 폭로하고 이론화시킨 사람이다. 이 마키아벨리즘이 근대 정치 철학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정치라는 관념에 높은 기대치만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현실은 삼류인데 일류를 원한다는 말이다. 이 메꿔지지 않는 틈에서 정치 혐오증이 싹튼다. “에라! 이 더러운 것들. 니들 맘대로 다 해 처먹어라!!” 

정치 혐오는 위정자들이 즐기는 달달한 꿀이다. 혐오가 무관심을 낳기 때문이다. 무관심이 클수록 잇속 챙길 자리는 늘어난다. “정치에서 등 돌린 당신, 엄지 척!!” 현실 정치인들은 그렇게 웃는다. 자신들을 향한 손가락질을 오히려 즐기면서 말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를 감시하려면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현실로서의 정치를 직시해야 한다. 쉽게 말해 정치가 원래 삼류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치라는 요물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현실 정치 속을 들여다볼 다양한 거울이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 과거의 정치 현실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내부자의 생생한 기록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별의별 인간들이 등장과 퇴장을 거듭하며 일구어간 정치라는 이름의 복마전. 우리는 이 흥미로운 경기를 꼼꼼하게 관전해 낼 필요가 있다. 그 서사들을 통해 우리는 현실 정치의 맥락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정치를 더 냉정하고 꼼꼼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삼류의 정치를 사류, 오류로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다. 

최근 20년 사이 남재희가 내놓은 여러 권의 회고록은 이에 가장 부합하는 텍스트가 아닐까 싶다. 이념과 정책의 껍질 속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살아 숨 쉬는 이야기. 남재희 회고록‘들’은 정치에 등 돌린 당신의 혐오증을 도려내 줄 강력한 처방전이 되어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선 남재희가 누구인지를 밝혀보자. 1934년생인 그는 서울 법대 졸업 후 언론계에 투신해 <한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에서 20년 가까이 기자로 밥벌이를 했다. 1978년 박정희 정권에 발탁되어 정계 입문. 서울 강서 지역구에서 내리 여당 국회의원 4선을 지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엔 제11대 노동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렇게 20년 가까운 정치인 생활을 끝낸 후 그는 호남대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여기까지 그의 연혁을 살펴보면 “아하! ‘보수’와 ‘양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맞다. 그는 보수주의자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그의 이력에 심상찮은 기록이 새겨지기 시작한 건 21세기에 들어서다. <한겨레>, <프레시안>, <시사IN> 등 소위 진보언론으로 분류되는 진영에서 ‘수상한 글들’을 부지런히 써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수상함은 그의 본래 이력과 궤를 달리하는 관점들이 글 속에 점점이 박혀있는 것에서 파생되었다. 그는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엄청난 독서량을 가진 것으로 소문난 그의 내공은 그 상서로운 글들을 통해 대한민국 정치 현실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진보 인사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 적잖은 이들이 그를 ‘지성의 멘토’로 여기는 이유일 것이다. 90세 가까운 고령임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읽고 쓰는 그의 열정은 귀감을 얻을 만한 대목이다. 나 또한 그의 애독자임을 밝힌다.


어쨌거나 남재희의 이 독특한 이력은 그가 지난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꾸준히 발표한 네 권의 회고록을 통해 더욱 큰 빛을 발한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의 기억에서 복원된 지난 반세기의 내밀한 한국 정치 풍경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정치란 원래 인간이라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들이 모여 서로 밀당하면서 만들어가는 불완전한 발걸음이라는 것. 다만 그 안에서 좀 더 합리적이며 좀 더 명분 있고 또 좀 더 실리가 있는 것들을 각자가 히든카드로 꺼내 드는 일종의 ‘하우스 오브 카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언론 정치 풍속사 : 나의 文酒 40년>이다. 다산 정약용 연구로 일가를 이룬 박석무 전 국회의원과 담소를 나누다가 나온 아이디어가 불씨가 되었다. 정치인 시절 자신의 지역구였던 강서 지역의 잡지 <강서문학>에 1999년부터 글을 연재했다. 

기자 20년, 정치인 20년의 세월 동안 인연을 맺은 진보와 보수 진영의 수많은 인사들이 그의 기억을 통해 다시 등장했다. 윤길중, 송지영, 이병주, 선우휘 등 대략 50명 가까운 ‘잊혀진 거물들’이 그렇다. 정치, 언론판에서의 활약상뿐만 아니라 술자리의 야사까지 공개되며 그들의 인간적 면모가 도드라졌다.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2004년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이 책이 마중물이 되었을까. 그는 자신의 삶을 톺아보면서 지난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반추해낸 글을 모아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을 펴냈다. 이후 그의 회고는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과 <진보 열전>으로 이어지며 ‘전지적 남재희 시점’의 거대한 한국 현대사를 완성시켰다. 

글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특히, 기억할 만한 한국 정치사의 변곡점들을 외부가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 하지만 별다른 꾸밈없이 이성과 합리의 담백한 시각으로 접할 기회를 갖는다는 건 독자들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남재희라는 노장이 그걸 해냈다. 

네 권의 회고록을 읽는 데에 특별히 순서를 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 이왕 읽을 거라면 이 네 권을 모두 섭렵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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