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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재난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황홀한 최면
스즈메의 문단속
김경태 영화평론가(2023-04-10 17:55:35)



재난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황홀한 최면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규수에 이모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여고생 ‘스즈메’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그 상실의 아픈 기억은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어린시절의 모습으로 지금까지도 꿈속에 나타나 스즈메를 힘들게 한다. 우연히 마주친 청년 ‘쇼타’를 찾아 폐허가 된 마을에 들어간 스즈메는 재난의 원흉인 ‘미미즈’가 갇혀있는 문을 열어서 미미즈의 몸통을 묶어놓는 두 개의 요석 중 하나인 ‘다이진’을 실수로 뽑아버리고 만다. 쇼타와 함께 겨우 그 문을 닫아버리면서 마을을 지진의 위기에 구해낸다. 사실 쇼타는 미미즈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는 임무를 가업으로 물려받아 전국을 여행 중이었다. 그러나 고양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다이진이 쇼타를 유아용 의자에 가둬버린다. 이제 스즈메와 쇼타는 다이진을 좇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문단속에 나선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신화적 상상력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을 인간의 통제 하에 둘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출발한다. 미미즈는 지진의 보이지 않는 진원을 거대한 환형동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예측할 수 없기에 예방할 수 없는 지진을 미미즈의 낙하로 지표면에 충격을 가하는 것으로 은유하면서, 애초에 미미즈가 문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한다면 사전에 끔찍한 지진을 막을 수 있다는 상상력을 펼친다. 물론 검붉은 연기가 뱀처럼 뻗어가는 기괴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공포스럽긴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아예 보이지 않기에 막을 시도조차 할 수 없이 순식간에 덮쳐오는 재난보다는 분명히 덜 두려운 존재이다.


다이진을 좇아 도쿄까지 오게 된 스즈메는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쇼타를 미미즈 위에 꽂아버린다. 쇼타는 어쩔 수 없이 다이진을 대신해 재난을 막는 요석이 된 것이다. 쇼타의 할아버지는 스즈메에게 수백만 명의 도쿄 시민을 구했으니까 요석이 된 쇼타의 희생은 충분한 명분이 있으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스즈메는 끝까지 저세상으로 들어가서 요석이 된 쇼타를 구하려고 한다. 영화는 재난을 막기 위한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수백만 명의 목숨이 한 명의 목숨보다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적 층위에서는 불가능한 시도를 한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명이 죽어야만 하는 재난영화의 오랜 딜레마를 극복한다. 쇼타를 되살려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를 위해 스즈메는 시공간이 뒤얽힌 저세상으로 향한다. 


쇼타를 되살리고자 하는 스즈메의 마음은 자신의 삶의 의지까지 일깨운다. 어머니를 지진으로 잃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스즈메는 쇼타에 대한 사랑을 통해 마침내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된다. 그건 쇼타도 마찬가지이다. 삶이란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스즈메를 만나서 더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며 요석으로 굳어 가는 자신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래서 영화는 인간의 생명이란 원래 고귀하기에 어떻게든 구해야한다는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건 사랑이라고 말하며, 그렇기에 어떻게든 더 살아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스즈메의 문단속>은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거나 유족들뿐만 아니라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국민을 위로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지진이 발생했던 과거로 향하기보다는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지진을 막기 위한 노력들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다가올 재난에 대한 예측과 예방을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참혹한 재난 상황을 탐미적으로 가시화하며, 재난을 현실로부터 조금 밀어낸 채 좀 더 견딜만한 것으로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과거의 상처에 대한 치유를 넘어 삶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며,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지진의 공포에서 벗어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황홀하게 최면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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