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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 | 연재 [ESG 문화예술 돋보기]
국악기 공방 소리새김, 폐현수막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
지속 가능한 문화예술을 위하여
류나윤 기자(2024-01-10 11:32:50)

지속 가능한 문화예술을 위하여

지난해 문화저널은 네 차례에 걸친 포럼을 통해 ‘ESG와 문화예술의 만남’을 들여다봤다. 예술인과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지역 사회의 ESG 사례와 성과, 그 의미를 진단하는 자리였다. 다행히 ESG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예술가들의 실천은 늘어나고 있지만 지역의 ESG에 대한 인식은 아직 낮았다. 몇몇 기업에서 ESG 실천을 내세우고 있지만 아직은 선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저널은 새해 기획으로 전북 지역에서 ESG를 실천하고 있는 문화예술 현장을 찾는다. 환경(E), 사회(S), 지배구조(G)에 대한 논의가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과제가 된 지금. 지역의 ESG와 문화예술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 되기를 기대한다. 신년호 주인공은 국악기 공방 ‘소리새김’이다.



국악기 공방 소리새김

폐현수막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



거리에 걸린 형형색색의 현수막들. 선거철마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선거가 끝난 후 이 수많은 현수막은 어디로 가는 걸까? 2018년 지방 선거에서는 8만여 장의 폐현수막이 배출되었다. 이는 축구장 25개의 면적에 해당한다. 당장 다가오는 2024년 4월 국회의원 선거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거철이 아니더라도 명절이나 각종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각 정당과 시민단체는 경쟁하듯 현수막을 내건다. ESG 기획 연재 'ESG 문화예술 돋보기'는 버려지는 현수막으로 국악기를 만들고 있는 진안의 '소리새김' 공방을 찾았다.


진안군 읍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마령면의 깊은 곳에 한 공방이 있다. 소리새김의 김태근 대표는 15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국악기를 만들어온 베테랑 제작자다. 장구의 울림통에 쓰이는 나무를 자르는 것부터, 마무리 옻칠까지 직접 그의 손을 거친다. 전통 국악기를 만들던 이곳에는 5년 전부터 폐현수막이 쌓이기 시작했다. 전주시 완산구청과 전주시새활용센터 다시봄에서 수거한 현수막들이 대부분이다. 전처리 후 진안으로 와, 아름다운 소리를 만드는 타악기로 재탄생한다.

김태근 대표가 폐현수막으로 인조가죽을 만들게 된 계기는 공방의 마스코트, 삽살개 '소리'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장구 헤드(양편의 가죽 부분)는 개나 말 등의 동물 가죽으로 만든다. 동물 복지가 중요시되는 현대 사회의 풍토와는 반대되는 방식이다. 김 대표는 오랜 시간 국악기를 만들며 이에 대한 고민이 있었으나, '전통'의 틀을 깨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를 제대로 만들어 오래 쓸 수 있게 만들면 되겠지, 하고 작업해 왔어요. 그러다 몇 년 전에 큰일을 겪어 힘들었는데 그때 '소리'가 큰 위로가 됐어요. 그 뒤로는 동물 가죽을 못 만지겠는 거예요. 내가 이 친구한테 위로를 받았으니까, 그 위로를 받은 만큼 뭔가를 해줘야겠다. 그런 마음이 생겨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거죠.”



시작은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다. 국내 사례가 없어 해외 사례를 찾아가며 연구했다. 실제 소리새김의 공방에는 1천여 개가 넘는 샘플들이 쌓여 있었다. 탄소 섬유, 유리 섬유 등 다양한 소재로 도전하다 폐현수막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젊은 시절 학교에서 기후와 환경을 전공했던 배경이 있어 업사이클 소재에 관심이 많은 그였다. 그 뒤에도 인조가죽 개발은 계속되었다. 여러 유관기관의 도움을 받아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국내 유수의 국악인들에게 멘토링과 자문을 받았다. 그렇게 자그마치 5년이라는 세월을 여기에 매달렸다.

인고 끝에 만들어진 소리새김의 악기용 인조가죽은 전문 연주자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존의 장구소리를 완벽하게 재현한다. 천연가죽으로는 불가능했던 소리의 규격화와 표준화도 이뤄냈으며, 온습도에 강하고 내구성이 좋아 관리도 용이하다. 가죽에 디자인을 입혀 연주자의 취향대로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것도 큰 특징이다. 이런 장점을 증명하듯 현재 서울국악관현악단, 부산국악관현악단 등 국내 주요 연주단체에서 사용 중이다.

전문 연주뿐 아니라 국악 교육, 전통 굿즈 등에도 활용된다. CGV와의 협업을 통해 폐스크린을 활용한 인조가죽을 만들고, 굿즈로 상품화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또한 학교에 보급되는 교육용 장구 헤드를 교체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기존에 보급되던 장구는 표면을 하얗고 매끈하게 보이기 위해 화약 처리를 많이 하여 쉽게 찢어지고 삭으며, 인체에도 유해하다. 2023년 전주시새활용센터 '다시봄'과 함께 전주시 관내 5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시범 배포하고 좋은 반응을 얻어 내년에는 전국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소리새김의 목표는 한국을 넘은 해외 진출에 있다. 드럼이나 팀파니 등 양악에서 쓰이는 타악기의 필름 소재 와 경쟁하기 위해 다양한 제품을 개발 중이다. 소리새김은 작년 명상과 요가, 음악 치료에 널리 쓰이고 있는 악기인 오션드럼의 필름 헤드를 인조가죽으로 대체하여 '환영'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시켰다. 여기에 한국적인 음색과 디자인까지 담아 해외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다. 소리새김의 악기는 담고 있는 가치, 소리의 완성도, 시장성까지 모든 부분에서 더욱 확대되고, 나아가고 있다.

"음악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데, 그 음악을 바꿀 수 있는 건 바로 악기거든요. 저희가 악기 하나를 팔면 세상에 폐현수막 한 장이 없어지고, 쓸데없는 동물의 희생이 없어져요. 그렇게 소리새김의 악기가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대표의 아름다운(?) 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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