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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 | 연재 [시]
지금 남한에서는
김영춘(2004-01-27 13:47:50)

이 나라 선생님들
악마 같은 돈이 미워서 불쓰듯이 뿌려 없애기라도 했는지
띄약볕 한여름 뚫고 경제교육 받으러 간다.
이십대 선생님도 오십대 교장선생님도 간다.
걷고 자전거 타고 오토바이 타고 별 일이 있어도 간다.
소집 시간이 가까워지면
옵내 국민학교 강당 앞에 슬금슬금 모이는데
형편이 말씀이 아니다.
유행 지난 양복에 그을리고 찌둥그린 이맛살에 
아이들에게 보충수업비 받은 것이 죄로 갈 일이
라고 생각하는지
반가운 대학 동창을 만나도 눈도 제대로 못 맞춘
악수 나누고 총총히 강당 안으로 사라져 간다.
공산당이 봤으면 기관원이 감시한다고 하겠다. .
사라진다고, 그냥 사라질 수도 없다. 
이름 주민둥록번호 착실히 적어 내고
빌린 강당 상한다고 양쪽 발 구두 위에 
시장에서 물건 살 때 담는 비닐 씌워 발목 묶어 
들어간다. 
이 몰골을 집에 가던 아이들이 볼까 무섭구나
시장가던 마누라가 볼까 두렵구나 
교실 두어 칸 크기의 의자없는 강당 마룻바닥애
삼사백명 선생님 줄맞춰 주저앉는다
슬라이드 상영한다고 창이라고 하는 창은 모조리 
검은 천으로 가리니 
살다가 병신된다더니 이게 무슨 꼴인고
폭염 속 사람 삶아 죽이는구나
교육동지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만나뵙게 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자리가 불편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해마다 똑같은 소리로 교육장님 인사를 하자.
선생님들 하나같이 기탤 곳도 없이 잠들기 시작하고
슬라이드 저훌로 돌아가는데 내용이 폭발적이다.
야간학습까지 시켜 가르쳐 떠나 보낸 아이들은
어딘가로 화염병만 육십분간 던져대고
김일성의 졸개인지 선생님의 동포들인지는
핏발선 눈으로 육십분 내내 대포알 쏘아대고
뒤이어 을라온 젊은 강사는
제가 누구한테서 배워서 출세했길래
국제정세 이야기한다며 반말했다가 말았다가 하고
약장수 같은 말솜씨로 자는 선생님들 깨워
야당 총재를 준엄하게 꾸짖다가
그러니 선생더러 이나라 경제를 어찌하라는 것인
지 말도 없이
위대한 경제교육이 막을 내린다.
깨끗한 선생님들 발냄새 땀냄새 어우러진 속을 지나
허겁지겁 비닐 끌러서 돌려주고 나오는 길
선생 무너진 가슴 재가 되고 재가 된 가슴 눈물도 없어라.
곧 피도 마르겠구나.
그래도 국민의 학교라고 키운 비둘기 몇 마리
담장 너머로 훨훨 날아가는데
모진 햇빛이 두 눈을 쏘아 어지러웠다.
혹시 북쪽 하늘 아래 사는 동포들
우리가 김정일이 핏대 을리는 화면을 보고 있는 동안
이런 텔레비전 연속극 보고 있는 것 아닌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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