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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 | 연재 [문화저널]
흰 종이배 접어
박남준 시인(2004-01-29 10:54:40)

30. 청춘
맑은 사랑이 있었다. 까닭모를 그리움이, 미움이, 원망이, 눈물은 없는가, 한숨은, 영원한 것은 없는가 아타까움에 날밤을 새던, 뒤돌아 보면 아득한데 사랑은 어디서 왔나 그 솟아나던 그리움은, 이제 다시 돌아가지 못하리라.

31. 부엉이가 울던 밤
부엉 부엉 부엉이가 우는 겨울 밤에는 요 울 할메 이야기 보따리 풀어놓게 하고는요 불 지핀 아궁이를 뒤져 꺼내온 군고구마를요 뒤뜰 장독대에서요 한바가지 퍼내온 살얼음이 살살 얼은 동치미에 곁들여 먹다보면은요 꿀맛같은 군고구마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몰랐을 거라고요 겨울 밤을 보냈는데요 동생보다 하나 더 먹을려고요 꿀꺽 삼킨 그 뜨거운 고구마를 뱃속에 넣고도 야단을 맞을까봐서요 배를 잔뜩 움켜쥐고 말도 못하고 앉었다 일어났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끙끙 거렸더래요.

32. 첫눈 무렵
차마 다 깍지 못하고 남겨두었던 두 손가락끝 손톱. 그랬었지. 아직껏 치우지 못하고 묻어둔 가슴 어딘가의 한쪽을 잘라내는 것 같았지. 철컥철컥 잘라내 버린 그후에야 시작되는 첫눈. 이제 잊혀져 세상을 뜬 낡은 기억의 그 가슴떨리던 첫사랑이라도 되새기자는 것인지. 첫눈이 오시네.
12월 11일 전주지역 첫눈. 비를 뿌리며 아침부터 잔뜩 웅크려 있는 하늘. 오늘은 저 하늘 한 모퉁이가 소원처럼 열려 눈이 오려나 기다린다는 것은 때로 즐거운 일인가. 출근을 하여 자리에 앉았지만 책상 뒤편동으로 난 유리창 밖으로 자주 눈길이 가는 것은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첫눈, 그것은 한편으로 어린 날의 즐겁고도 재미있는 기억으로, 눈싸움을 하고 호호 시린 손을 불며 눈사람을 만들던 일. 이 눈이 내려 쌓이면 유년의 그날들로 다시 돌아 갈 수 있을까? 쯧쯧 철딱서니 없는 것 같으니라고 멋쩍은 웃음을 실실 입가에 맴돌게 했지.

33. 그리고 투명해져 갔다
이윽고 오시는 눈. 진눈깨비를 동반하다 그칠 듯 그만 그칠 듯 그렇듯 애를 태우더니 함박 웃음 자아내는 첫눈. 함박눈 첫눈이야. 창문 열어봤어? 251-1573, 75-8606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에 전화. 함박눈을 맞으며 길을 걸었지. 뱃속까지 투명해지던 지선생과의 소주. 그리고 그날 나는 몇곳의 술집을 더 거치며 투명해져 갔지. 그 옛날 삼류극장, 필름이 뚝 끊기고 나서의 새하얗게 빛살지던 화면. 필름이 끊겼다. 대취였다.

34. 새해
뻔하지 뭐 묵은 해가 가고 묵은 달력이 떼어지고 묵은묵은 그런 것들이 다른 것으로 예를 들면 해가 바뀐다는 것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지겹게 들을 것이다. 도대체, 혹 피치 못할 고민이라도, 항상 젊은 날이 아니라네, 그 끝에 빼놓지 않는 언제나의 이야기. 새해에는 꼭 장가를 가게. 가고 바뀌고 먹고 꼭 가고 그렇다면 새해라는 것이 뭐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도 다만 이 험난한 세상 살아 갈 걱정만 바뀌지 않고 남아 있을뿐. 변함없이.

35. 새삼스럽게
어쩌자고 글을 쓰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 왔나 술을 마시지 않는 밤이면 어김없이 살아온 날들 뒤돌아보며 내쉬는 한숨. 책상, 만년필, 채워지지 않는 비인 원고지. 쓰여지지 않는 날, 쓰지 못한 날도 그렇지만 한줄의 글을 쓰고 나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었냐 고작 그것뿐이었냐 부끄러웠다. 부러운 다른 삶들이 비웃음처럼 엄습했다. 언제나 좀 나아질까.

36. 산중의 술
한번 생각해 보려는가 이런 술자리 말이네. 술상을 보았다네. 그리던 벗이 먼길을 마다잖고 찾아 왔었다네. 구차한 산중 살림 살이에 금주 미주며 산해진미의 안주가 마련될 수 있으리오만 박주산채의 술상일망정 벗과 함께 세상의 시름일랑 다 놓고 그저 미소에 미소가 술잔에 술잔을 넘나 들었다오네. 뎅그렁 뎅그렁 멀리 산사의 범종소리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를 풍악으로 감싸안고 울리는 정경, 이윽고 밤이 다 이울도록 골짜기를 지나 드넓은 강물로 바다로 유장하게 흐르던 술판은 그칠줄 모르고 세상 사람들아 이처럼 좋은 술판 아는가 모르난가. 어떤가 괜찮은가 한번 그리 해 보게나.

37. 적막의 방
그가 떠나가고
알 수 있어 문을 열면 거기
오래도록 불이 꺼져 있는
먼 불빛마다 피어 오르는
그마다 쌓여 놓인 적막
그가 내게 남기고 간 보따리
겹겹의 그리움 풀면
내 얼굴 길게 가로지르며 매듭마다 흐르는
가눌 길 없는 회한의 갈 곳 없는 강.
갈 곳 없는 강 하나가
눈물 강 하나가 떠도는 온 밤

38. 흰 종이배 접어
그리움의 종이배 접어
백날이고 천날 흰 종이배 접이 띄우면
당신의 그 바다에 닿을까요
먼 바람결로도 꿈결로도 오지 않는
아득한 당신의 그 바다에 닿을까요

그리움의 종이배 접어
백날 삼백 예순 다섯날 흰 종이배 접어 띄워요
바람같은 당신께로 가는 사랑
흰 종이배 접어 띄워요.

39. 저기 보이는 길
이제 부르지 않으리라. 기다리지 않으리라. 서성이며 서성이며 지는 노을로 다시는 그림자 길게 늘이지 않으리라. 나 이제 떠나리라 자욱히 이는 안개, 바람부는 저 들을 지나 우거진 잡목 가시나무 숲의 산길 헤쳐나가리라. 비로소 열리는 눈. 이제껏 나를 가로막고 당신을 막아 붙잡던 모오든, 그 모든 것들. 그리하여 찾으리라 저기 보이는 길. 그 길 끝에 달려오는 그리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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