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2.1 | 연재 [문화저널]
보천교(普天敎)- 정읍군 입암면 대흥마을 -
김융곤 입암중학교 교사(2004-01-29 11:02:03)

정읍에서 국도 1호를 따라 장성으로 가노라면 노령재를 미처 못가서 행정구역상으론 입암면 접지리와 마석리에 위치한 대흥 마을을 지나게 된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농촌 마을로 보이나 탈색된 면사(綿絲)가 즐비하게 널려있는 모습과 도시형태의 직교형 도로망은 순수농촌마을과는 다른 독특함을 금새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마을에 운집한 약 60여 업체에 달하는 직조공장은 연간 총 매출액 200억원 이상으로 이 고장의 생활경제를 주도하고 있으며, 일반농촌의 이촌향도 풍조와는 다르게 이 지역 인구증가의 요인이 되고 있다.
이와같이 대도시 지향산업인 직조공업과 도시형의 직교형(直交形) 도로망이 대흥마을에 발달하게 된 이유는 신흥종교의 일파인 보천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보천교는 차경석(車京石 : 호는 月谷, 東學接主 東重弼의 長子로서 대흥마을에서 자람)에 의해 창교 되었는데, 그는 증산(贈山)의 제자이며, 증산의 제2부인 고씨와 이종남매지간이다. 차경석은 증산의 사후 고씨가 교통을 계승하여 대흥마을에 교단(敎團)을 이룰 때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고, 1919년에는 자신이 교통(敎統)을 전수받았음을 주장하며 고부인(高婦人)과 별립(別立)함과 동시에 60방주(方主)의 교체(敎體)를 형성하여 포교상의 성과를 올렸다.
그뒤 1921년에는 함양 황석산 고천제(告天祭)에서 보화교(普化敎)로 개칭하였고 1922년에는 보천교란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천지가 인(仁)으로써 생(生)하고 의(義)로써 성장한다는 인의(仁義)를 교리로, 경천(敬天: 일심으로 공경하여 천은에 보답함), 명덕(明德: 착한일을 행하며 스스로 자기의 덕을 밝힘), 정륜(正倫: 인도를 바로잡고 행함), 애인(愛人: 내몸을 아끼듯 다른 사람을 사랑함)을 4대 강령으로 삼았고, 전세계가 대동단결하여 평화, 공존, 공영(共榮)의 세계를 이룩해야 한다는 대동(大同)을 그 목적으로 정하였다.
그후 교세는 날로 확장되어 서울과 각도에서 보천교 진정원(眞正院) 및 포교소를 설치하였고,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하였으며, 대흥마을에 웅장한 규모의 새로운 성전(聖殿)인 십일전(十一殿)을 건립하였다. 십일전은 건평 350평에 높이 87척(약 26m)이나 되는 15포 집으로 대들보의 길이는 48척(약 15m), 둘레는 7.9척(약 2.4m)이었고, 지붕은 황색기와였으며, 만주 로령(露領)에서 가져온 목재를 사용하였고, 건물주위는 길이 한자, 너비 한자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은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대흥마을에 보천교 본부가 자리를 잡게 되자 교도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오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 전반기의 대흥마을은 550여호의 커다란 마을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와같은 보천교로 인한 많은 인구유입으로 대흥마을의 효율적인 공간활용이 필요해졌고, 이에 보천교의 교기(校旗)와 교장에 새겨있는 정자형(井字形)을 본따서 도로망을 직교형으로 구획하였다. 또한 크게 흥하게 될 마을이란 의미의 대흥(大興)마을 자체도 보천교의 발전으로 인한 많은 인구유입 때문에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민구성은 대부분의 순수농촌마을과는 달리 이북출신을 포함한 전국 각지의 출신들인데, 영남지방출신들이 제일 많은 편이다.
이들 전입자들은 보천교도 중에서도 독실한 신자들 이었으며, 간부급들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생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보천교의 일에 열중하였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신도들은 차 교주의 제위등극설(帝位登極設)로 오래지 않아 자신들도 고관대작이 되는 꿈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둘째로 당시 일제 식민지하의 억압된 정치상황에서서 보천교를 민족적인 종교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업을 외면한 생활은 일제의 종교탄압과 십일전 건축등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으로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보천교 본부는 교인들의 단체적 노동으로 산업을 진흥시킨다는 취지로 기산조합(己産組合)이라는 자치단체를 결성하였고 직조, 옥비녀, 등나무, 가구, 핸드백용 구슬, 대통(담배대) 등을 만드는 기술과 원료를 제공하고 제품을 생산하도록 하는 등 가내공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천교의 산업장려정책은 경제적 타산이 맞지 않아 2~3년만에 유명무실해졌고, 1936년 차 교주의 사망과 일제의 종교해산령으로 교체는 와해되고, 십일전은 강제철거 되었으며, 경제적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토지기반이 약한 전입자들은 여러 가지 가내수공업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그중 직조공업과 옥비녀 공업만이 명맥이 유지되었다.
그뒤 민족종교활동이 가능해진 광복후 다시 교단을 정리하여 신도수가 상당수에 달하게 되었으나, 차경석을 보천교의 교조(敎祖)로 받드는 신파와 증산을 교조로 하고 차경석을 교주로 받들려는 구파가 갈등을 보였고, 마침내 1954년 차교주의 언행을 모아 편집한 성서간행과 차교주의 영위봉안문제등으로 분립되어 교세는 더욱 침체되었다.
한편, 명맥으로 유지해온 직조공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는 1962년부터 농업협동조합과 국민은행으로부터 영세 기업자금을 지원받아 다소 활성화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중소기업은행의 영세기업 자금지원과 국내외 경기호조로 급격히 성장하였고, 1980년대 이후는 직조공업의 집적(集積)이 요인이 되어 타 지역의 업체가 유입되거나 새로운 공장이 설립되어짐으로써 1991년 10월 현재 60여개 업체에 달한다.
그러나 보천교의 교세는 보천교의 가장 큰 행사인 동지치성(冬至致誠)때 모이는 참석자 수가 신구파 모두 약 20~50명 정도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매우 쇠퇴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신흥종교인 보천교의 영향으로 형성된 대흥마을은 비록 보천교 그 자체는 쇠퇴상을 보이고 있으나, 보천교가 마을의 지표공간에 남겨 놓은 토지의 이용, 산업구조등의 흔적은 현재까지도 뚜렷이 남아 있어서 사상이나 종교 등의 인문현상이 경관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