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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2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판소리명창] 모흥갑과 주덕기
최동현․판소리 연구가(2004-01-29 11:30:16)

다가공원은 옛날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담소를 즐기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전주천이 휘돌아나가도,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빽빽이 늘어선 곳이니, 한여름 더위를 식히며 놀기엔 적합한 곳이었으리라. 더구나 징검다리 하나만 건너면 될 만큼 시내로부터 가깡누 거리였으니 말이다.
다가산의 포근한 품 아래 쉬러오는 사람이 많다보니, 그 곳에는 전주 지방 관리들의 치적을 기리는 선정비(善政碑)니, 불망비(不忘碑) 따위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지금도 수십개에 이르는, 이끼 묻은 비석들이 가득한 이곳은 봉건 왕조 체제의 이데올로기 선전장의 역할도 했던 것이다. 하여간 이곳에는 쉬려오는 사람들을 위한 정자도 있었던 모양인데, 다가정(多佳亭)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이 정자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전주천 양 쪽에 쌓아놓은 제방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된 것이라고 하니 다가정은 냇가에 면한 넓직한 공터를 끼고 있어 훌륭한 소리의 공연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소리꾼의 일화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모흥갑과 그 제자 주덕기에 얽힌 이야기이다.
모흥갑(牟興甲)은 초기 소리꾼중 활동 양상이 구체적 증거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현재 서울 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평양가사 부임도>라는 병풍이 그것인데, 이 그림속에는 <名唱 牟興甲>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판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부분이 있다. 주위에 수양버들이 둘러 서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능라도에서 감사 부임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면서 판소리를 감상하는 자리인 듯하다.
주덕기(朱德基)는 오랫동안 모흥갑과 홍흥록의 수행 고수 노릇을 했다고 하니, 이 그림속의 고수는 주덕기일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초기 판소리의 존재 양상을 전해주는 자료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그림에 나오는 모흥갑은 가왕(歌王) 송흥록과 동시대 사람으로 <적벽가>를 특히 잘했다고 하는데, 평양 연광정(練光亭)에서 소리할 때는 덜미소리(‘목덜미에서 내는 소리’인 듯하나 불명)를 질러 10리 밖에서까지 들리게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모흥갑의 출생지는 경기도 진위라고도 하고, 전북 죽산, 혹은 전주라고도 하는 등 확실하지가 않은데, 다만 만년에는 전주 부근에서 산 것이 거의 확실하다.
주덕기는 전라남도 창평 사람이라고도 하고, 전주 출생이라고도 하는데, 송흥록과 모흥갑의 고수로 오랫동안 그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어떤 명창의 수행고수가 되어 활동하는 것은, 고수를 업으로 삼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고, 그 길이 명창들로부터 소리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판소리사에는 고수로 활동하다가, 고수에 대한 멸시를 참지 못하여 고수 노릇을 버리고 수년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명창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더러 전한다. 소리를 하러 길을 갈 때 도 소리꾼은 말을 타고 가면, 고수는 북을 짊어지고 걸어다녀야 했다거나, 소리가 끝나고 바든 보수도 고수는 소리꾼에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요즈음도,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고수에 대한 보수가 소리꾼의 삼분의 일 정도인 것을 보면, 고수에 대한 하대(下待)는 여전한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 명창의 소리 동기가 순전히 그런 멸시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차라리 명창이 되기위한 수련 방법으로 명창의 고수가 되어, 그런 하대와 멸시를 감내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학원이나 국악원이 있었을리 없으니, 수업은 어차피 개인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옛날에는 판소리가 가장 인기 있는 것이었을 것이므로, 대명창 정도 되고 보면, 한가하게 어디 눌러 앉아 제자를 가르치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수행고수가 되어 늘 함께 기거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주덕기가 송흥록&#8228;모흥갑과 같은 당시 최고 명창의 수행 고수 노릇을 오래 했다는 것은, 그가 그런 대명창으로부터 오랫동안 수업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간,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주덕기는 고수에 대한 하대에 불만을 품고, 산 속에 들어가 피나는 노력 끝에 명창이 되었다고 한다. 주덕기는 산 속에 들어가 소나무 밑둥지를 베어놓고, 주야로 제사를 지내면서 수련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나무 수천그루를 베어냈다고 해서 <벌목정정(伐木丁丁)>이라는 별호를 얻었다는 사람이다.
이제 모흥갑과 주덕기에 얽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모흥갑이 만년에 전주 난전면(亂田面) 귀동(貴洞, 지금의 어느 곳인지 확인하지 못했음)에 살 때였다. 어느 날 물건을 살 일이 있어서 전주장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침 다가정 앞을 지나가는데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어 웬일인가 싶어 군중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당시 명창이며, 한 때 자기 수행고수 노릇을 하던 주덕기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청중들은 주덕기의 소리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얼씨구’ , ‘좋다’하는 등 추임새 소리가 낭자하였다. 모흥갑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청중 속에 앉았다. 소리가 끝나자 청중들은, ‘모흥갑은 물론이요, 가왕 송흥록에게도 지지 않을 명창’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주덕기는 교만해 져서, ‘모흥갑은 같이 논할 수도 없고, 송흥록도 오히려 우러러보아야 한다’고 자화자찬을 하였고, 청중들도 그에 수긍하는 듯 했다. 모흥갑은 주덕기의 교만함에 화가 나서 썩 나서며 ‘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송흥록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가요, 가왕의 칭호까지 받은 공전절후의 명창인데, 주덕기의 행위는 무례막심하다’ 고 꾸짖은 뒤, <춘향가> 중 <이별가> 한 대목을 앞니가 다 빠져버린 입술소리로 불렀다. 그리고는 주덕기에게 ‘한번 따라 불러보고, 내 것보다 나은 점을 제시해 보라’고 하자, 주덕기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 사죄하였다고 한다.
이 때, 모흥갑이 앞니가 다 빠져 버려 입술소리로 부른 그 소리의 가락이 매우 특이하여, 주덕기를 통해 후세에 전해졌는데, 이를 <강산제(岡山制)>라고 한다. 그런데, 그냥 ‘강산제’라고 하면 서편제 소리의 시죠로 일컬어지는 박유전의 ‘강산제(江山制)’와 혼동될 수 있기 때문에 박유전의 ‘강산제’와 구별하여, 동강산제(東岡山制)‘라 일컫기도 한다.
앞의 ‘강산제’로 불렀다는 <이별가>는 ‘여보 도련님,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 날 다려가오. 나를 어찌고 가랴시오. 쌍교도 싫고, 독교도 싫네. 어리정 충청 걷는단 말게 반부담 지어서 날 다려가오.~’하는 대목으로, 현대 판소리에도 이와 같은 대목이 있으며, 일제 시대 내에는 ‘강산제’라 하여 부른 것이 있다.
모흥갑은 <적벽가>를 특히 잘 불렀다고 했거니와 그의 <적벽가>는 주덕기를 통해 정춘풍(鄭春風)에게 이어지고, 현대의 박동진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는 전승계보만을 통해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소리꾼은 이어받은 것을 그대로 부르는 게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창조적으로 부르기 때문에, 현재 박동진의 <적벽가>는 모흥갑이나 주덕기가 부르던 소리와는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다만, 전승 계보 상으로 보면 아무래도 또 그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진 부분도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얼마만큼이 변하지 않은 부분이며, 얼마만큼이 변한 부분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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