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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2 | 연재 [문화저널]
아름답고 고마운 죄덩어리여
김영춘 시인(2004-01-29 11:40:13)

시간만 나면 요 글인지 시인지 하는 놈을 마루 밑 툇돌 옆에 쯤에 내던져 놓고 별것도 아닌 사랑처럼 끌고 다니고 싶어서 못본척도 해보고 게으름도 부려 봤었는데, 3~4년 전쯤해서 썼던 시 한편을 읽다가 어줍잖게 살아온 발자욱들이 이렇게 용서없이 떠올라 주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찬 소주 한 병으로도 충분히 어젯밤의 기막힌 사랑도 사연도 몽땅 다 잡아먹어 잊어 버리고 깜깜절벽으로 나 몰라 나 몰라 하며 살아가는 주제에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거기다가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렸으니 이제 서른 여섯 살, 시란 놈한테 진정으로 무릎 꿇는 항복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모 출판사로부터 청탁을 받아 〈젊은 북녘 시인에게〉라는 시를 쓰게 되는 때는 내가 실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6년쯤 가르치던 때로 기억된다. 한마디로 내가 이 세상에 생겨나 얻어 짊어가지고 가는 죄로 밤이고 낮이고 몸부림 치던 그런 시절이었고 이 때의 죄란 결국 사람값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때도 그렇고 지금은 더욱 그렇지만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사람들 가운데에 놓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나는 주둥이로 지껄이는 말뿐이었지 사람값 하고는 거리가 먼 그런 인생을 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정신이 들면 가슴을 치고 또 치고, 마시고, 울고, 부끄럽고 온통 그러하였다.
내 시는 무엇을 적었던가? 예술이라고.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말했던가? 교육이라고. 나는 조국을 위해 무엇을 실천했었던가? 세금을 봉급에서 떼었다고. 모두 모두 그러하였다. 그러하였을 뿐이었다. 그 즈음의 나는 연필을 들어 시를 쓴다고 하면 이 땅의 아프고 몸서리 치는 이야기 하나 쓸 수 없는 뜬구름 흘러가는 사는 일의 도나 생각하고 있었고, 교실에 들어 가면 졸업식도 전에 아이들이 공장으로 팔려가도 빈자리 보면서 뻔뻔스럽게 울지도 않고 문제집을 풀면서 아이들이 내 말을 잘 듣기나 바라는 그런 선생이었고, 술자리에 가면 나라 망쳐먹는 몇 놈들 골라 욕이나 실컷하며 객기나 부리다가 조국의 기본 모순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않는, 세상일 다 그런 것이라고 유치하게 생가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그래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때 응어리진 죄덩어리가 지금도 가슴 한 귀퉁이에 남아 따라 다니고 있지만 사람값을 못해서 생긴 죄 야야기는 그만하고 그래서 쓰게 된 시나 적어 보겠다.

젊은 북녘 시인에게
입 밖으로 불러 본 지 얼마인가.
돌아보면 잔별같은 야속한 세월뿐입니다.
너나 없이 마음을 버리고 말로만 살아온 하늘 아래서
당신 나에게 죄 잇습니다.
진정으로 나는 당신에게 더 큰죄가 있습니다.
그 일 잊어 보려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우리는 새끼를 키우는가 합니다.
그 일 끝내 잊지 못하게 하려고
이쁜 놈들 조선 천지에 자꾸 생겨나는가 합니다.
우리가 어려서 놀던 동산 있지요
울타리 뒤로 헉헉 숨차게 뛰어 오르면
늙은 소나무 밑 살찐 무덤 여러개 있고 양지 바른 곳
나와 당신을 믿고 사는 어린 것들
방학때라도 만나 삐비 뽑아 나눠 먹으면 정들텐데요
실하게 커서 서로 사랑하게 될텐데요
무덤 뒤로 살살 기어 돌며 술래잡기도 해봐야
덜썩 커서 아름답게 통일한 텐데요
덩치 크고 약빠른 미국이며 소련이며 중국이며 일본아이들 무찌를 텐데요
핵무기며 시멘트며 자본주의며 공산주의며 조국앞에 내팽개칠텐데요
아아, 누가 가만히 불러 듣기만 해도 그리운 젊은 북녘 시인아
나는 남녘의 서른 세 살 빛나는 시인입니다
그라하여 하늘과 조국과 어린것들 앞에 죄인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같이 살며 서로 죽는 것을 알아 눈물 질 때까지
끝없는.
아직 살아 있는 목숨으로 마음을 전합니다

꼭 모든 시가 뚜렷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런 전망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저 〈아직 살아 있는 목숨으로 마음이나 전하고 있었던〉이 시를 쓰고 난 뒤 나의 삶은 중대한 전환을 하게 된다. 내 오직의 사랑, 아이들과 시라고 하는 큰 길 앞에서 결국 사람값을 제대로 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본 적으로 시작 되었다고나 할까.
이 시를 쓴지 1년만에 죄로 얼룩졌지만 그래도 새 출발의 온갖 소망이 남아 있던 교단에서 쫓겨 나게 되었다. 저들이 부르는 대로 한다면 전교조 관련 좌경용공 교사인 셈이다. 이제 사람값 좀 하고 있냐고 누가 묻는다면 지금도 똑같이 정말 할 말이 없지만 해직된 몇 년 그 밤낮없이 정신못차리게 밖에서 활동하면서 살았던 시간동안 참으로 많은 것들을 알았다기 보다는 배웠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정세라고 하던가? 세상 돌아 가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궁핍한 모양새로 사무실에 나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 갈 이야기만 하는 해직동지들의 꿈이 이루어지기는 아직 쉽잖아 보이고 이 반도의 앞날 또한 더욱 험해 보이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세상아 조금만 기다려 다오. 집에 가면 우리 세 살박이 쌍둥이 딸아이가 ‘철의 노동자’를 부르고 다섯 살박이 아들이 ‘종필이 영삼이 팔자고쳤지’ 노래를 부르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부끄럽게 웃는다. 가슴이 답답한 오늘이긴 하지만 죄는 죄값을 하는 법. 죄값으로 우리가 살고 있을진대 거져 오지는 않겠지만 좋은 세상 반드시 오지 않겠는가?
그때 적어 놓았던 시작 메모를 덧붙인다.
“자꾸 부르다 보면 먼 뒷날이 그래도 달려오고야 말리라는 믿음인데. 사랑인데. 통일인데. 조국인데. 끄떡도 없는 사람의 일아. 이웃의 삶은 저리도 눈물겹고. 아직도 시를 대단한 무엇으로 알아서 버리지 못하는 내 눈꼽만한 생각의 무식함. 가엾은. 원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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