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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2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백제의 고도 왕궁유적(2)
유철 부여문화재 연구소 연구원(2004-01-29 11:40:52)

추정 금당지
이 건물지는 5층 석탑에서 북쪽으로 약 37.5미터 되는 곳에 위치한다. 조사 이전에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던 관계로 유구의 파손 및 교란이 심하였다.
조사결과 동서방향으로 장축을 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평면형태로 내부는 통칸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각각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지로 드러났다. 건물의 규모는 동서 19.3미터, 남북 12.5미터이며 기단부를 포함하면 동서 23.3미터, 남북 16.5미터 정도이다. 또한 기단의 구조는 미륵사지의 금장지와 같은 2중기단으로 추측된다. 금당지로 추정되는 이 건물지에서는 500여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약간의 토기류와 금속류를 제외하고는 와당류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들 중 특히 주목할 수 있는 유물로는 『관궁사(官宮寺)』『상부대관(上部大官)』『궁사(宮寺)』『중부지와(中部之瓦)』『전부갑월(前部甲月)』『부하(部下)』등이 명문된 기와들이다.

추정 강당지
강당지로 추정되는 이 건물지는 5층석탑과 금당지의 중심선상에 위치하며, 금당지에서 북쪽으로 약 28.3미터 정도에 위치한다. 건물지의 규모를 보면 정면이 14.8미터이고, 측면은 9.2미터이며 기단부를 합하면 정면이 17.5미터, 측면이 11.6미터 정도이다. 이 건물지 역시 추정 금당지와 같이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이루어졌으나 규모면에서는 약간 작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의 적심석은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기단토를 파내고 잡석을 2~3단으로 축조하여 쌓고 윗면을 평탄하게 처리하였다. 이에 비해서 기단부는 파괴가 심하여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폭 30~40센티미터, 깊이 15센티미터의 도량이 건물지 외곽으로 돌아가고 있고 여기에서 주먹크기만한 냇돌들이 확인되어 기단부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기단내부 북서편에서는 직경 12센티미터의 원통형 토관이 흑갈색 북식토가 가득 채워진 채로 노출되었는데, 이것은 배수시설로 추정되었다.
이 건물지에서는 거의 대부분 와전류가 출토되었으며, 출토된 와편중 금당지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상부대관(上部大官)』의 명문기와가 상당수 출토되었다.

5층 석탑
이 5층석탑은 오아궁리 유적을 남북으로 반분한 남쪽편에 위치하며, 일명 왕궁탑이라고 불리워진다. 이 탑은 높이가 8.5미터 정도로 균형미가 있고 장중한 감을 주는 석탑으로 보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탑은 왕궁리 유적내에서 현재까지 전하는 단하나의 석조물이기도 하다.
이 탑은 1층 기단을 가진 5층 석탑으로서, 기단부의 가장 하단은 12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위에 11매의 판석으로 기단받침을 설치하였다. 기단은 4개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각면에 2개씩 모두 8개의 탱주(撐柱 : 버팀기둥) 등 모두 12개의 판석으로 구성하였다. 우주와 탱주의 표현은 1매의 판석에 우주와 면석을 조각한 부재가 4개, 그리고 1매의 판석에 탱주와 면석을 조각한 부재가 8개 등으로 나뉘어진다. 갑석(甲石)은 1면을 3매의 돌로 쌓았는데, 네귀는 약간 들리는 반전을 하고 있다. 또한 갑석위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1층 옥신은 각면의 중앙에 1개의 탱주와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하였는데 모두 8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다. 옥개 받침은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각각 4매의 석재들로 조성하였으며, 그 위에 11매로 이루어진 옥개석을 받고 있다. 탑신부는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줄어드는데, 이에 따라 사용된 판석수도 줄어든다. 탑의 옥신부는 2층에서는 4매의 판석이 사용되며, 3층부터는 2매의 판석이 사용된다. 옥개석도 4층부터는 4매만이 사용되는데 이 탑의 옥개석은 추녀끝이 가볍게 들리는 백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탑신의 정상에는 1개의 노반석이 올려지고, 그위에 복발과 앙화만이 남아 있어 정확한 상륜부의 구조는 알 수 없다. 이 탑의 기단부는 해체 복원공사 이전에는 매몰되어 있었으나, 문화재 관리국 주관으로 실시된 1965년 해체공사시 원래의 기단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현존하는 이 탑은 해체작업후 훤형대로 복원된 이후의 상태이다.
한편 이 탑은 해체복원시 다른 탑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진귀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출토품은 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이다. 1층 옥개석의 중심에 놓여진 방형석에 좌우로 2개의 방형공을 뚫고 안치된 뚜껑이 덮인 금동함이 각각 발견되었다. 동쪽 금동함에는 금제 사리함과 녹색의 사리병이, 서쪽 금동함에서는 두줄의 금띠로 묶여진 금판경이 발견되었다. 또한 기단부 심초석에도 품(品)자 모향의 사리공이 있었는데, 동쪽 사리공에서는 광배와 대좌를 갖춘 청동여래 입상 1구와 청동령 1개가 있었으며 북쪽 사리공에서는 향 종류가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발견당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단한 것으로 평가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탑은 해체공사시 이러한 출토 유물이외에도 신비스런 영응(靈應)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1968년 12월 5일 오전 9시부터 이 탑의 2층부분과 기단부를 해체하기 시작했는데, 매우 쾌청했던 날씨가 기중기가 판석을 들어올리는 순간 갑자기 먹구름이 일어나 태양을 가려 어두워지면서 안개와 같은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물들을 엄숙히 거두어 수납하자 구름도 문득 걷히고 먼지도 가라앉고 안개도 말끔히 걷혔다고 한다. 이는 부터님의 조화에서 비롯된 이변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 해체공사를 담당하던 이가 김천석씨였는데 그 분은 상층부 해체작업시 갑자기 병을 얻어 드러눕게 되었다. 병세가 악화되어 임종이 가까워졌는데, 이 보물이 나오자마자 병세가 씻은 듯이 완치되어 결국 그 사람 손으로 복원공사를 마무리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 역시 불가삼보(佛家三寶)가 들어 있는 석탑을 함부로 다룬 것에 대한 신의 응험이라고 믿고 있다.
이렇듯 고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발굴조사시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발굴조사전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돼지머리와 과일, 북어, 술 등을 차려놓고 제사(개토제)를 지내며 유물출토시에는 온통 긴장감이 맴돌곤 한다. 이러한 제사는 선인들이나 각종 귀신들의 혼을 달래서 그들의 분노로 예기치 않은 사고를 막기 위함도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돈만벌면 된다는 생각으로 선인들의 유적을 조금의 미안함도 없이 마구 파헤치거나 파손하는 도굴범들은 그들의 분노를 모르고 하는 짓들인지 한번쯤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러한 복원작업을 통해서 현재 원형대로 서있는 이 탐의 축조연대에 대해서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초 등의 3가지 주장이 있으나, 기단내의 흙속에 유물과 탑내부의 구조양식 및 출토유물로 보아 백제계의 양식을 상당수 답습한 고려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궁리 유적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 이외에도 매우 신비롭게 느낄 수 있는 괴석(怪石)들이 여러개 있다. 이 괴석들은 대리암, 석회암, 석영, 점판암, 천매암 등의 변성암계로 왕궁리 유적에 14개, 인근한 금마국민학교에 25개 등 약 40여개가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원래 금마국민학교에 있는 괴석도 왕궁리 유적에서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이 괴석중 제일 큰 것은 폭이 약 2미터, 높이 1미터쯤 되는 것인데 이를 제석(짐승발자욱 돌)이라고 부른다. 이는 마치 말이 밝은 자국 같은 요철이 나있는 아름답고 괴이한 돌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하며 “백제 무왕이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왕도지를 잡을때에 그 백마가 밟은 발자국”이라는 설화가 얽혀 있기도 하다. 이 괴석들은 매우 희귀하고 아름다운 돌로서 백제 궁궐내에 있었던 정원석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어 백제인들의 조경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 이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궁리 유적은 마한과 백제사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학자들간에서도 많은 관심이 집중된 곳이기도 하다. 마한의 도읍설은 희박하나 요사이에 들어서 마한시대에 해당하는 일명원삼국 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어 좀 더 많은 자료의 보충을 기대할 뿐이다. 이에 비해서 백제의 궁터였다는 주장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유적지 내에서는 『상부대관(上部大官)』『관궁사(官宮寺)』『궁사(宮寺)』『중부지와(中部之瓦)』등 명문된 와편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 와편들은 부여 사비성내의 옛 궁터나 사원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흡사한 것으로 백제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상부대관(上部大官)』등의 명문와는 유적의 북반부에서 주로 출토되고 『관궁사(官宮寺)』, 『궁사(宮寺)』등의 명문와는 남반부에서 주로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북편에는 궁궐이 있었고, 남편에는 궁궐에 속한 사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고 보며 궁궐내에 사원을 두었던 예가 일본서기에도 나타나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위와 같은 주장이 사실로 드러나면 백제사에 도 하나의 큰 획을 그어야 할 것이며, 그러므로 이 유적은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곳이라 생각된다.
오늘에 어제가 묻혀가듯 과거는 현재에 묻혀져 간다. 과거인의 자취는 점점 잊혀져 가고 사려져 간다. 사회의 변화와 과학의 발달등으로 대부분의 학문이 상호 보완적이며 고고학이라는 학문도 역사학, 사회학, 생물학, 과학등의 접근이 점차 증가되고 있다. 특히 과학의 발전은 고고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요즈음에는 실제로 과학적 분석이 고고학에 적용되고 있으며 좀더 과학적인 분석 및 방법에 의한 발굴 조사는 과거의 실체 규명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왕궁리 유적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러한 방법에 의해 규명될 이 유적의 실체는 현재는 홀로 남아 서있는 탑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양 고성방가에 오락만을 일삼는 관광객들에게 진정한 역사의 장으로 제공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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