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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2 | 연재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경마장 가는 길
박현국 자유기고가(2004-01-29 11:41:21)

영화는 예술의 한 갈래에 속한다. 예술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가 아름다움이라고 할 때 영화 역시 재미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재미와 의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재미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나의 모습이 예술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하여 걸러졌을 때 진정한 의미의 내자신의 투영된 모습을 통하여 거기에 빠져 들어 웃을 수 있고, 그 웃음 속에 도사린 나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통하여 나를 되돌아 보게 된다. 그래서 예술은 인생의 전 생애를 보여주는 통시적 모습이 아니라 인생의 단면을 공시적으로 묘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나무를 관찰할 때 나무의 뿌리끝에서 가지 끝까지 다 관찰하지 않고 나무의 단면에 새겨진 나이테만 보고서도 나무의 연령과 성장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천체를 관측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천체의 생성에서부터 소급하여 모두를 볼 수는 없다. 다만 하루저녁 반짝이는 별의 색깔이나 위치 만으로도 그 별의 생성이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예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전모습을 그릴 필요도 없고, 그릴 수도 없으며, 그린다고 해도 인간의 현실과 예술 작품으로 투영된 모습이 일치할수도 없다. 그렇다면 ‘경마장 가는 길’이 제시하는 재미와 의의는 무엇인가? ? ?
먼저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제목부터 문제 삼을 만한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경마장은 달리는 말을 구경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시설물을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경마장에 가서 달리는 말을 자유스럽게 구경한다. 경마장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일상인들에게 있어서 경마장은 생사가 걸린 것도 아니다. 그리고 마권을 사서 달리는 말에 돈을 걸어 행운을 바라는 사람도 대부분 그것에 밥줄이 걸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 더 재미 있는 것은 이 작품이 그러한 경마장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경마장에 가는 길일 뿐이다. 단지 길만을 바라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존재의 본질을 찾아나선 구도자의 길로서 나그네를 상징한다고 볼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 길은 경마장에 제한을 받는 길이다. 시장에 가는 길이 먹을 것을 구하러 간다거나 물건을 팔아서 돈을 구하는 길이라고 볼 수 있고, 정거장을 향하는 길이 여행을 위한 길이고, 집을 향한 길이 안식과 평온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경마장 가는 길은 다만 달리는 말을 구경한다거나 마권에 돈을 걸어 요행수를 바라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은 특정한 인생의 의미나 목표를 둘만한 길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제목에 비추어 이 영화가 제시하는 의미 역시 ‘그렇고 그런 내용’일 수 밖에 없다.
현대 예술의 특징은 한마디로 그렇고 그런 인간을 소재로 삼아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진행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콜린윌슨은 이런 특징의 부류에 드는 인간을 ‘아웃사이더’라고 규정한 바가 있다. 현대예술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한결 같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 직접 맞부딪히면서 삶을 아파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할 수도 없고, 이상만 먹고 살 수도 없고, 비일상성을 벗어나지도 벗어날 수도 없는 삶을 묘사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R이나 J역시 그렇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이름도 없으며,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 사이 역시 부부나 애인 관계도 아니고, J가 R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스승과 제자로서 엄격한 관계가 설정된 것도 아니다. 물론 R에게 가정이나 아내 자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특히 R이 유학에서 귀국했을 때 그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인 R에게 별거 아니라고 하면서 물러 앉는다. R이 부인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부인은 이미 8년 전부터 들어온 이야기로 식상해 있다. 그러한 말에 더 이상 말할 만한 가치도 없다는 눈치이다. R은 이혼이유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R이 이혼을 한다고 해도 당장 J와 결혼 한다거나 동거하겠다는 확약도 없다. 다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R은 J만 보면 성관계를 갖자고 한다. R의 표현을 빌리자면 솜처럼 풀어져버릴 것 같은 육신이 J와 섹스를 통하여 새롭게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J역시 그러한 요구에 쉽게 순응하지 않는다. R도 또한 그녀의 그러한 태도에 못마땅해 하면서도 거기에 침잠해 하지 않는다. R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성적인 것에도 더 이상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 역시 부정적이다. 밤에 교회의 네온사인 십자가를 보면서 마치 유럽의 공동묘지에 와 있는 듯하다는 말이나, 더 이상 농사는 지어서 무엇하느냐는 빈정거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어차피 이 영화는 더 이상 의미도 재미도 없는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의미나 재미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우리의 출생 자체가 부모의 애정에 따라서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필연에 의한 것인 양 운명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이 출생의 우연과 생활의 필연 사이의 간격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든다. 이 떨쳐버릴 수 없는 인간의 숙명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현대인의 고뇌이자 아픔이다. 이 아픔을 영상화 시킨 것이 ‘경마장 가는 길’이리라. 경마장이 더 이상 필연과 우연의 길이 아니듯 인생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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