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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4 | 연재 [문화와사람]
조각가 정현도노동의 가치로 투영해낸 생성과 소멸의 미학
김은정 편집위원(2004-01-29 12:13:50)


지지난해 조각가 정현도의 작업장을 찾았을 때는 좀의 한중간에서였다. 그는 그때 전주에서의 첫 개인전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가 일러준대로 찾아간 전북대 예술관 앞 널찍한 공터에 비닐 천막을 쳐 놓은 작업장은 석제공장의 한켠에 들어 선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대리석과 화강암과 온갖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로 너저분했다.
온몸을 죄어들게하는 기계소기와 희뿌연 돌가루를 뒤집어 쓴채 그는 한동안 돌깎아내는 작업에 매달려Te사. 돌가루가 튀어나오면서 생기는 기괴한 마찰음 때문에 그 작업장에 머무르는 것을 포기해야했던 나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서야 그의 작업을 지켜 볼 수 있었다.
<느낌이 왔을 때 곁을 골라내고 깎아내는 작업의 연계성 때문에 기계를 바로 뗄 수 없었다>는 그때 그의 말은 조각가 정현도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참으로 소중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꼭2년 만에 그를 다시 찾았다. 늘상 음습해보이는 그이의 교수실 겸 작업실(겨울을 막 벗어난 직후 여서인지 그의 작업장은 교수실 바로 옆에 칸막이로 되어있다)은 예외없이 축축하다. 그 맑은 봄날 돌덩어리와 하나가 되어있었던 그는 오늘은 몹시 지쳐있고 무료해보인다.
“작업을 거의 못했어요. 겨울이어서 기도하고 잡히지도 않고…‘
그는 끝말을 잇지 않는다. 제멋대로 끓고 있던 난로 위의 주전자가 튄다. 커피를 타고 있는 동안 연구실 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작품을 만져보았다. 새까만 빛깔의 <오석>이다.
“어때요, 그 작품. 왜 그런 것 있죠. 같은 작품 중에서도 유난히 애정이 가는, 그래서 내 손에 그냥 두고 싶은, 그런 작품이예요.”
2년전에도 그 작품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다.
<생성과 소멸>. 그의 작품 대부분에 부여되어 있는 주제이다.
「생성」과「소멸」은 상반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함으로써 서로의 존재의미를 가능케하는 한고리로 엮어진 관계일수 있다.
정현도에겐 「생성」은 곧「소멸」이고, 「소멸」은 다시「생성」에 이르는, 자기존재 확인의 끝없는 질문과 대답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점각(點刻)부조의 규칙적인 표면점령. 잔잔한 명암의 이미지가 이어내는 회화적 분위기의 부드러운 흔적을 통해 그가 투영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적․공간적 개념들은 그 자체로서 존재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무와 유의 관계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생성과 소멸의 이치가 결국 우리 삶의 바탕이 아닐까 싶어요.”
그때 2년전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덧붙인다.
“역사라는 것도 말이죠. 이루어져 온 역사가 있으므로 오늘이 있고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역사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당위적인 것이란 말이예요”
그랬다. 70년대 말부터 「생성과 소멸」을 주제로 일관된 작업을 해 온 그는 인간의 존재인식 뿐 아니라 시대와 역사까지도 이 주제 속에 용해 시켜내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조소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7-8년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전북과 인연을 맺은 것은 84년 전북대 사대 미술교육과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6년여만에 그는 자의든 타이든 이지역에서 꽤(?) 알려진 조각가가 되어있다. 거리 조형물에 보수적인 전주지역에 현대조각, 그것도 추상형태의 작품을 새롭게 등장시켜놓은 그는 자신의 이름보다는 「한국은행 앞의 조각품 작가」로 혹은 시내 한복판「대신증권 앞의 조각품」작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 스스로 이지역에 정을 묻어버린 이곳 사람이라는 표현을 내놓는데 인색하지 않다.
대부분 작가들의 유년시절이 그렇듯 조각가 정현도도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그림 잘그리는 아이>로 인정받았고 서울예고에서도 역시 서양화를 전공했다. 묘사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대학에 들어가 전공을 결정하면서 큰 갈등을 겪었다. 결국 노동력과 정신세계가 이어내는 예술의 힘에 매료돼 조각을 택했다. 그후에도 또 한번 갈등을 안았다. 구상과 추상작업의 사이에서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학 때는 구상작업을 참으로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졸업직후 구상에 대한 한계를 느끼면서 형태를 벗어나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는 그것을 <자기역량의 한계>라고 표현했지만 당시엔 배고픈(?) 영역이었던 추상작업을 기꺼이 붙잡은 것이 그러한 이유의 전부가 되지 못함을 감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나무를 통한 <생성과 소멸>의 美學 찾아나서기였다. 5-6년 동안 의 나무작업, 83년부터 3-4년동안의 돌작업, 이후의 돌과 브론즈작업에 이르기까지 그는 오직 <생성과 소멸>의 美學을 주제의식의 한중간에 세워둬왔고, 그것은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영원한 주제로 그에게 투영되어 있다.
그는 처음 나무 모자이크 기법에 의한 비석형태 혹은 입방체의 작품을 냈다. 그러나 소재를 돌로 바꾸면서 자연석의 단면들을 사용한 부정형(不定形)으로 형태가 바뀌었고, 점으로 된 음각이 점진적으로 소멸돼가는 기법을 동원함으로써 광선을 이용한 리듬감과 경쾌성을 부여한 새로운 미학의 개방성을 이루어냈다. 근래 돌작업과 병행하고 있는 동을 이용한 용접작업에센 돌기둥위에 반원형 금속조각을 접합시켜내면서 섬세하고 우아한 미적 효과를 표출해내는 성과를 얻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반응은 거창한 구조적 조형구성이 평가의 주된 요소로 작용하는 조작분야에서 의외적인 것이면서도 때문에 신선한 자극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목재로 유기적인 추상형조형작업을 장기간동안 하여 재질에서 연유된 조형적 가증성을 탐색한 경험을 보여주었다. 석재조형작품은 그의 새로운 소재를 통한 조형작업과 탐구의 일차적인 결실이다」는 임영방의 평처럼 그가 이루어낸 미적 성과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단없이 모색해온 주제의식과 소재의 접합작업에 대한 그의 치열한 창작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현도는 자신의 작품이 기법면에서 먼저 보여지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 재질의 특성을 섭렵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했음에도 또 치밀한 솜씨와 기술적인 연마가 자기 작업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법과 내용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보여지는 것을 그는 강하게 바란다.
“아직도 주제가 농밀하게 용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자극을 주곤 합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벗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깎았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가장 당혹스러운 것도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정현도는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운이 좋은 작가다. 남들이 쉽게 내놓는 <상복>도 자신의 <운>고 무관하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지난82년은 상복많은 그에게 잊혀질 수 없는 해가 되었다. 그해 5월 한국미술협회전 동상을 수상한 그는 7월에는 중앙미술대전 장려상을 9월엔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탔다.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은 국전이 30회로 막을 내리고 새롭게 시작한 첫 번째 공모전이었던데다 처음으로 점수제가 도입된 자리에서 최연소자로 수상했던 의미있는 상이기도 했다. 그의 상복은 지난해 말에도 찾아왔다. 제1회 김종영조각상을 전혀 뜻밖에도 그가 수상하게 된 것이다. 어느 상보다도 스승을 추모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기리는 이상의 첫수상자가 된 것에 들뜨도록 기뻐했던 그가 이렇게 말했다.
“어쩐지 무엇엔가 옭아매여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그래서 작업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3년안에 해야할 수상기념 작품전도 걱정스럽고 부담이 된다고 했다.
갑자기 그의 작업실을 훔쳐보고 싶었다.
작은 공간에 크고 작은 돌들이 제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돌 잘생겼지요? 진안에서 주워온 돌인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요즘은 자연석이 그렇게 좋을 수 없어요. 이 색깔 좀 봐요. 깎아내면 수백년 세월을 입은 색이 이렇게 변한다니까요. 이 자체가 바로 생성이자 소멸이예요. 마치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이…”
그는 중단없이 작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작업을 못하고 있다고 했던 것은 자신이 쏟아 부어야 할 노동력의 미흡함때문이었을까.
그는 변화와 리듬이 모여 조형적인 요소를 이루어내는 통상적인 작업과는 반대의 작업으로 과정을 지켜간다. 그 변화와 리듬을 오히려 파괴하는 규칙적인 음각은 그의 정신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모든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손에서 마무리하는 그의 철젛마과도 닿아있다.
그의 작품에 대해 정병관은 이렇게 평한다.
< 그의 작품이 주는 신선함과 우아함은 보기에 따라서는 한국적인 정서의 자연적인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한국예술의 윤리적인 가치가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제의 생성과 소멸은 현대성이 가지는 특성에 속하지만 무수한 음각작업이나 용접기법의 반복을 예술에 있어서의 전통적인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한 것이다.>

앞으로도 상당기간동안 돌과 용접작업은 지속될 것 이다고 말하는 정현도는 이즈음 평면에 형성된 공간과 그 조형성에 새로운 미의식을 투영시키는 작업을 탐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재로부터 무한한 자유로움을 획득해 내고자하는 그의 의지와 맞닿는 것이자,「생성과 소멸의 미학」을 보다 본질적으로 이어내고자 하는 그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그가 말했다.
“예전에는 산다는 것과 작품이 하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던 것이 작품은 작품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인식으로 바뀌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이예요. 이즈음엔 아니다. 한작가의 작품은 그 작가의 삶을 반영하는 바로 그 삶 자체라는 인식이 들더란 말이죠.”
그는 어려운 과정에 들어서 있음에 틀림없었다. 노동의 가치로 부여했던 그의 작품세계가 이제 정신의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순간, 그 정신의 힘이 작가자신의 개인적 사상과 체험에 안주하지 않고 내 이웃과 사회에 대한 따뜻한 애정까지를 포용하는 힘으로 확대되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실을 나오면서 그가 앞뒤 없이 이렇게 말했다.
『해온 일보다 해야할 일이 더 많으니까요.』
그는 그 많은 일들을 위해 점각 부조의 규칙을 지켜가는 것처럼 최선을 다할 것이다.

조각가 정현도는 1950년생으로 전북대 사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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