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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4 | 연재 [교사일기]
제자들이여! 부디 바보가 되라
장진호․남원고 교사(2004-01-29 12:15:11)

‘교육대학살’이라 일컫어지는 89년 전교조 가입교사들에 대한 대량 해직사태 이후 설레기도 하면서 찹찹한 마음으로 교단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가 89년 9월 1일. 짧은 세월이었지만 피부에 와 닿는 교육현실을 느끼면서 깊은 고뇌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절망감을 맛보시고 하면서 조금씩 경력이 붙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땐 도도한 물길에 흡수되어 버리는 시냇물처럼 나 자신도 이런 저런 타성에 젖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이런 때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주는 존재는 바로 내가 가르치는 머리가 큰(?)학생들이다. 처음에는 서로가 서먹서먹했지만 자기들과는 나이 차가 가장 적은 선생이라서 그런지 곧잘 다라주곤 해서 잠시도 나태해질 수 가 없게 한다.
그런 어느 날 나에게 신규라는 딱지가 떼어질 무렵 평상시에도 항상 개방을 해놔서 심심치 않게 학생들이 방문을 해오는 나의 하숙방에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처음 남원고등학교에 와서 2학년 수업을 들어갔을 때 별로 말이 없었고 항상 지친듯한 얼굴 표정을 학 있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하게 살아 있어서 수업시간 내낸 한눈을 팔지 않고 수업에 열중했었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학생이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온 것이다. 해가 바뀌면서 그 학생이 3학년에 진학하면서 서로 만날 기회가 없어져 학생의 모습도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었지만 내가 알기로는 성적이 1․2등을 다투는 우수한 학생이고 품성도 착실한 학생이었으므로 나에겐 이외의 방문이었다. 자리에 앉아마자 하는 말이
“선생님, 저는 법학을 전공하고자 합니다. 또 시험에 합격할 자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회의를 느낍니다. 정의와 형평의 원칙이 잘 지켜지는 사회인줄 알고 있었고, 또 그런 사회를 유지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고자 법학과를 선택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저의 생각이 잘못된 거라는 판단이 듭니다. 선생님 저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좋을까요?”
라며 나에게 도움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라 그 자리에서 나는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 몇마디만 해주고 나서 몇일 후에 다시 만나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한데 그를 보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의 범위가 점점 더 막연해 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개인 차원의 상담이 아니라 지배 집단이 강요하는 논리 즉 교과서 속의 지식과 피부로 느끼는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파생된 고민이었기에 더 막막했는지도 모른다. 결국은 내가 바빴다는 변명조의 핑계로 지금까지 어물어물 지나쳐 버린 점이 마음 한 구석에 짐이 되어 있다. 이제는 졸업을 하고 원했던 법학과에 들어간 그 학생에게 그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하려고 한다. 혹자는 인류 역사에 위대한 진보를 가져온 세 개의 사과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우선 아담이 에덴의 동산에서 따먹은 사과를 이야기 해 보자. 기독교에서는 이것이 인류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와는 달리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계명을 거역하고 자유의지를 선택하게 된 최초의 상징이었다고 해석한다. 두 번째로 뉴우턴이 그 유명한 ‘만유인력’을 발견하게 된 사과이다. 이것은 자연의 공포로부터 인간이 지식과
이성의 독립을 선언한 찬란한 기록이 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윌리암텔이 활을 쏘아 맞춘 사과가 있다. 이것은 암울했던 봉건시대에서 인간에 대한 압제를 전복하고 자유와 사랑을 실현하게 한 위대한 승리의 표현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다.
이처럼 인류 역사에서 단순한 일화로 넘겨버릴 조그마한 사건이지만 그 내면에는 인류 발전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또 이 일화들 속에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 있다. 우리 인간들은 신과 자연, 심지어는 같은 인간끼리도 서로 지배당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려는 노력을 창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준비해왔던 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자유(自由)의 영역’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어떠한가? 그 학생으로 하여금 고민하도록 만드는 것도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결과라고 본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위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고 그것의 기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하고 아주 기본적인 ‘자유의 영역’마저 침탈 당하는 사회구조, 또 그러한 사회구조를 옹호하고 유지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으로, 금력으로, 혹은 어떤 방법으로든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자들 때문에 우리는 긴 세월을 독재에 시달려 왔었고 아직도 그 잔재가 청산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창 귀중한 시기에 이 땅의 많은 학생들이 실로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로 여기에 그 날 찾아왔던 학생에게 선뜻 내 나름대로의 조언을 해주지 못한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이 정상적인 사회에서 비정상적인 문제가 나타나면 쉽게 해결을 할 수가 잇겠지만 문제는 현재 우리가 비정상적인 사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 상식선상에서 행동하는 사람이 바보 취급받고 낙오되어 버리는 세상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사고 방식으로는 학생들에게 바보가 되라고 말하고 싶지만 학생들 개개인을 생각해서는 어찌되었든 조금만 참고 견디어 사회에 나가면 잘 살수 있을거라고 말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과서와 현실이 다르다고 마냥 고민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나에게 찾아왔던 학생들과 같은 처지의 이들은 그들 스스로 어떤 삶을 택해야 할지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나는 비록 그 과정을 지켜보는 제 삼자의 입장이 되겠지만 나에게 한 마디 할 기회를 준다면 기꺼이 그들에게 바보가 되는 길을 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유는 단 한가지 인간이 비록 신과 자연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부터 자연스러워 질지 모르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자유스러워 질 수는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의 존재’ 즉 ‘양심’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바보의 길을 택할 것을 못난 선배의 입장에서 권하는 바이다. 단 그 길은 결코 영광스럽거나 편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자 한다. 자신의 희망대로 법학과에 진학을 한 사랑하는 제자여, 부디 ‘정의와 형평’의 원칙에 고민만 하는 나약한 존재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으며 그대에게 다음 글을 바칠까 한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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