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1.5 | 연재 [문화저널]
老子의 『도덕경(道德經)』
김기현․전북대 교수․동양철학(2004-01-29 12:19:21)

몇 년전 어느 대중가수가 우리의 향수 어린 “얼룩송아지 ”의 동요를 외제조립품이라 비난하면서 “누렁송아지”를 찾았을 때 이럴 들은 사람들은 다소 당혹과 혼란을 느꼈을 줄로 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어려서부터 별로 본 일도 없는 얼룩송아지를 마치 우리 이웃의 동무인 양 그렇게 정답게 불러왔던 것이다. 저 노랫말 속의 얼룩이와 우리 앞마당의 누렁이 사이의 불일치를 우리는 어쩌면 여지껏 의심 한 번 해본 일이 없었단 말인가. 우리의 무신경이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한편 수십년간 속아왔다는 느낌에 억울한 생각까지 든다. 차제에 우리의 신경을 날세워 삶의 ‘얼룩’여부를 점검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길’의 교묘한 조작으로 인하여 사물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정치의식만 해도 그렇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추한 모습을 워낙 정직하게 드러내므로 그네들의 ‘얼룩정치’의 허구성을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법 한데 실제로 각종선거의 결과를 보면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교묘한 지휘에 따라 ‘얼룩’을 합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천박한 상품사회 또한 온갖 “거짓욕구”를 양산한다. 기업가들이 교묘한 광고기술로서 개발하는 ‘얼룩욕망’의 멜로디에 휩싸여 우리는 이제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는 삶의 진실된 욕망에 귀기울이지 못한다. 조작의 손길은 우리 자신에게도 있다. 갖가지의 사적인 이해관심이 우리의 감각과 판단을 덧칠해 사물들의 실상을 수없이 호도하기도 한다. ‘존재’의 명경(明鏡)이 아닌 ‘소유’의 흑심(黑心)에 사물은 허상만을 내비칠 뿐 그 참다운 모습은 이미 저만큼 멀리 벗어나 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삶은 어쩌면 온통 ‘얼룩이’로 범벅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속에서 老子는 다음과 같이 같이 충고한다. “致虛極 守靜篤(치허극 수정독)”-기왕의 지식들을 버려 마음을 텅 비우고 더 거친 욕망들을 내쳐 마음을 고요속에 두어라, 그는 또 말한다. “復歸于嬰兒(복귀우영아)”-그리하여 어린아이의 천진한 눈빛으로써 만상을 꿰뚫라, 상대적 지식과 거짓된 욕망으로 얼룩진 삶의 허상에서 벗어나 자신과 사물 그리고 세계의 참모습을 찾으라는 그의 말은 시대를 넘어 이고 우리의 약석(藥石)이 되기에 충분하다. ‘얼룩’의 제거는 사물과 세계의, 그 동안 은폐되어온 실상을 개현시키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심미안을 열어주는 관건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란 선악과 시비, 욕망의 피안에서 무심히 다가오는 쾌감일진대 그것은 기존의 상투적 심리질서를 해체시키는 의의를 갖는다. 사실 우리가 현실의 시비판단과 이해득실에 마음을 두는한, 미의식은 눈뜰 수가 없다. 벌꿀로 얼룩진 마음에 꽃은 그 아름다움을 감춘다. 이념으로 얼룩진 마음에 ꡒ붉은 스카프ꡓ는 미의식은커녕 도리어 적대감을 자극한다. 그럼으로 역시 ꡒ마음을 텅 비우고 고요속에 두어라ꡓ세계는 그 모습을 아름답게 드러내리라. 삶의 정신도 이에는 참으로 건강함을 얻으리니. 혹자의 이른바 ꡐ21세기 문명의 치유소ꡑ로서의 노자 도덕경의 일독을 권한다. 다만 그난해한 내용을 우리 마음에 와닿게 해설해주는 번역서가 없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부족하나마 명문당 간행『노자』(번역/김학수․서울대교수)가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