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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 | 연재 [문화저널]
역사의 향기 남원 건지리 가야 고분군
곽장근․전북대박물관(2004-01-29 13:34:07)

요즈음 전북지방에서는 전지역에 걸친 활발한 학술조사를 통해 새로운 유적이 각지에서 발견 보고 되면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이 지역의 고대문화에 대한 실상이 상당 부분 밝혀지고 있다. 이런 유적들 중에 지리산을 중심을 한 동부산간지방, 즉 남원, 임실, 순창군 지역과 장수군 지역에서 조사된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 유적이 특히 주목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북지방을 백제의 영역으로 파악하여 그 문화내용 속에서 이 지역의 고대문화를 인식하고 있는 우리들의 생각과 이 가야계 석곽묘의 존재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가야계 고분의 존재이류를 밝혀 줄 수 있는 문헌자료는 많지 않아 고고학적으로 w사된 자료를 중심으로 그 실상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발굴조사에서 가야계 고분으로 확인된 건지리 유적을 중심으로, 그 지역 토착세력 집단의 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가야문화의 성격에 대하여 간단하게 파악하고자 한다. 유적의 보존상태 건지리 유적은 전북과 경남의 도계를 형성하는 지리산의 줄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야산의 구릉상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남원군 동면 건지리에 속하며, 유적의 인근에는 내건, 외건, 지산 등 3개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해발 450m내외의 고원지대로 마을의 동쪽에 있는 낮은 야산지역에 400여기의 고분이 밀집분포 되어 있다. 이 유적은 1986년 10월 남원지방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당시 그 지표조사는 새로운 유적을 찾겠다는 욕심보다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학계에 보고된 월산리 고분군 주변지역에 다른 유적이 있는지 막연한 흥미를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지표조사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지리 유적이라는 새로운 유적을 찾은 기쁨과 함께 한편으로 끌어오르는 분노와 허탈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 그 유적은 이미 유적으로서 진정한 의미를 상당부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된 그 유적은 고분을 축조한 우리 선조들의 역사적 사실을 대변해 주는 귀중한 역사의 현장이었으나 이미 완전한 폐허화된 상태였다. 당시 그 유적에서 수습한 토기편은 거의 쓸모없는 그릇조각에 불과하였으며, 무덤을 축조하는데 사용된 돌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강가나 야산에 뒹구는 돌들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또한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파헤져진 무덤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구덩이를 연상하게 하였다. 이런 유적의 파괴 흔적은 일부지역에 국한되어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전 지녁에 걸쳐 곳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상태였다. 우리 선조들의 귀중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는 유적을 이런 지경으로 처참하게 파괴한 장본인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유적을 파괴함으로써 역사를 지울 수 있는 어떤 특권이라도 부여받은 사람인가? 더구나 현장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한두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차례에 걸쳐 유적을 완전히 파괴시킨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그런 끔찍한 일을 했을까? 그리고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과연 어떻게 되었으며 혹시 보관되어 있다면 어디에 보관되어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 유적의 인근에 소재하고 있는 마을을 찾게 되었다. 인근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유적에 대해 파괴 내지 도굴과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 과정을 아주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건지리 유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건지리 유적에서 있었던 그러한 일들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고 유적을 본래대로 보존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는데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장황할 정도로 길게 소개하려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건지리 유적의 존재가 알려진 시기는 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사람들은 새마을사업의 시작과 함께 그 유적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되었다. 즉 본격적으로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서 주택개량이나 농로개설을 위하여 많은 돌이 필요하게 되자 돌을 구하려 멀리가지 않고 무덤 속에 박힌 돌을 빼내면서 고분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돌이 박혀있는 곳이 고분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순히 돌만 빼냈다고 한다. 따라서 그것이 고분이라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고분 안에 부장 된 유물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도 엄밀하게 말하면 유적에 대한 파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고분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몰랐고, 그 안에 부장된 유물도 본래 상태대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건지리 유적은 부분적인 파괴가 있기는 했으나 유적의 본래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에 이 유적은 점차 유적으로써 원상을 상실하는 수난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건지리 유적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많은 유적에서도 볼 수 있다. 이때부터는 돌만 빼내는 부분적인 파괴의 범주를 넘어서 부장된 유물을 꺼내는 전면적 파괴의 단계로 접어든다. 고분 안에 부장된 유물을 꺼내는 행위는 고분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치명적인 일로 흔히 도굴이라고 한다. 건지리 유적은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도굴꾼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도굴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공공연하게 도굴꾼들이 기다란 창과 삽을 휴대하고 나타나 마구잡이로 고분을 파헤쳤다고 한다. 그들은 먼저 창으로 아무데나 찔러서 고분의 존재를 확인한 다음 머리와 발쪽에 해당하는 부분에 덮인 돌을 들어내고서 유물을 꺼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지표조사를 통해 고분이 자리한 지역에는 반드시 두곳에 파헤져친 구덩이가 있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돌만 빼낸 고분도 이미 그 존재가 알려져 있으므로 도굴의 주요대상이 되어 그 안에 부장된 유물을 모두 꺼내갔다고 한다. 건지리 유적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도굴외에도 임야를 개발하는 과정 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분도 상당수에 이른다. 야산 개발은 중장비를 이용하여 마구 밀어붙이는 방법으로 실시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다. 이 지역에서 실시된 야산개발도 유적에 대한 사전 조사과정을 거치지 않고 불도저를 이용하여 이루어짐으로써 많은 고분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건지리 유적에 대한 파괴행위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8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지금까지 소개한 도굴 내지 파괴 행위는 당시의 상황에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고 치부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건지리 유적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근에 소재한 XX중학교 학생들이 직접 도굴작업에 참여하여 유적을 파괴하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그 중학교에 재직중인 교장선생님께서 학교에 향토관을 만들면서 유물이 필요하게 되자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도굴작업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 유물수색작업은 학교의 공식행사처럼 집요하게 이루어져 수습된 토기만도 자그만치 수백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학교에 내실 있는 향토관을 만들어 모든 학생들에게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려고 실시된 그 작업은 누구나 상당부분 공감할 수 있는 일로 생각된다. 어찌보면 도굴꾼들이 마구잡이식으로 유적을 파괴하는 광경을 보고 유물만이라도 보호하겠다는 차원에서 참여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또한 향토관을 만들기 위해 유물 수색작업에 참여한 것도 그다지 큰 문제가 될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려고 개설된 향토관에 수집된 유물이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현재 향토관 내에는 20여점 내외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는데, 전시된 유물 중에 완전한 것은 거의 없고 파손된 유물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수백점에 가까운 유물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향토관의 공간이 협소해서 차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필요없는 유물은 다시 본래대로 고분 속에 넣어 주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유물의 행방은 묘연할 뿐이다. 유물의 행방뿐 아니라 유물을 설명하는 안내문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거의 없다. 물론 안내문 작성은 전문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다소간의 착오는 생길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선조들이 밥그릇으로 사용한 토기를 ‘재털이’로, 실을 빼는데 사용된 방추차를 ‘말(末)의 장식’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착오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것이다. 또한 전시된 유물의 대부분은 가야시대 유물임에도 신라 내지 백제 심지어 조선시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안내문의 착오와 함께 이 유물들에 대해 가까이 있는 박물관이나 하다못해 고대사 관계 도록조차 참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와같이 향토관이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무관심한 상태에서 전시행정위주로 운영되고 있다면 분명히 재고되어야 하며, 그 향토관 개설을 구실로 자행된 도굴행위는 불법적인 것이다. 또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수백점에 이르는 유물의 소재가 분명하게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외국교과서, 특히 일본교과서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서술하였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언젠가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와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에 그리 절망적인 일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역사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로 삼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건지리 유적에서처럼 야산 개발, 향토관 개설 등 나름대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자행되는 유적의 파괴 행위는 역사의 왜곡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역사를 우리 손으로 영원히 없애 버리는 역사의 말살행위인 것이다. 정식 학술조사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상태에서 도굴로 파괴된 유적과 그 유적에서 얻어진 유물은 이미 그 역사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런 유적에서 출토된 아무리 귀중한 유물도 한줌의 흙덩어리,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며, 도굴되고 파괴당한 유적은 아무 쓸모없는 황무지와 같은 것이다. 발굴조사의 개요 이 유적은 1988년 여름과 겨울 전북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발굴조사되어 많은 고분 중 30여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2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는 봉분의 존재가 분명한 거도 있으나, 일부는 봉분의 존재조차 확인할 수 업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봉분의 형태가 확실하게 남아 있는 고분은 한 봉분내에 하나의 묘곽만 있는 것도 일부 있었으나, 대부분 한 봉분안에 여러개의 묘곽이 밀집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고분은 중앙에 길이 350cm이상, 폭은 60cm내외 되는 대형고분이 자리하고 그 주변에 길이 200-250cm 내외의 작은 고분이 여러기 분포되어 있는 형태였다. 또한 길이가 150cm미만되는 소형고분도 일부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봉분의 존재여부가 분명하지 않닸다. 여기에서 봉분의 존재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고분들은 본래부터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유실되거나 아니면 도굴로 인해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본래 봉분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근거는 발굴조사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유적이 수차에 걸친 도굴을 통해 거의 모든 고분이 이미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고분에 대한 파괴의 정도는 조사된 30여기의 고분중에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고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극심하였다. 도굴된 대부분의 고분은 유구의 형태조차 상당히 파괴되어 있었으며, 그중 심한 경우는 남아있는 몇개의 돌로 고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고분의 축조방법은 아래에 비교적 대형의 깬돌 또는 냇돌을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 가로 또는 모로 3-4단 정도 크기가 보다 작은 깬돌이나 냇돌을 쌓아서 벽을 만든 다음 위에 뚜껑돌을 덮어서 만들었다. 이 중 뚜껑돌은 도굴을 하면서 파제껴서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극히 적었다. 조사된 대부분의 고분들은 주로 동서로 길게 놓여 있는데, 시기가 늦은 것으로 보이는 몇몇 고분은 남북방향으로 길게 장축을 두고 있었다. 고분 속에 부장된 유물은 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이외에도 철기, 금동제 계통의 유물 등이 수숩되었다. 하나의 묘곽에 대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행해진 도굴로, 본디 유물의 배치상태를 보여주는 묘곽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유물이 어디에 부장되었는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일부 남아 있는 유물이나 그 파편, 때로는 부장된 유물을 꺼내고 난 뒤 남겨진 흔적에 의하여 발치쪽에는 토기류, 허리부분에는 철제칼, 도끼, 낫, 화살촉 등 철기류, 그리고 머리부분에는 일부 청동 및 금동제귀걸이가 부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건지리 유적은 전체 유적의 극히 일부만 조사되고 파괴 정도가 아주 심해 정확한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고분의 축조방법에 의하면 경상도 지방에서 조사된 전형적인 가야 고분과 상통되는 요소가 많은 점에서 가야계 고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건지리 고분을 축조한 집단은 출토된 유물에 의하면 대체로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이 지역에서 성장 발전한 토착 세력 집단으로 보인다. 문화저널 그러나 이와같은 결론은 여러차례 말한 바와같이 파괴에 의하여 남겨진 얼마간의 조각그림을 끼워맞춘 것이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실상을 밝힐 수 있는 기초작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더 명확한 실상을 그려 볼 수 있는 날이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그 때 비로소 우리지역의 고대문화와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확고한 자리매김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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