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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 | 연재 [문화저널]
박유전과 서편제
최동현․판소리 연구가(2004-01-29 13:36:20)

판소리사에 있어서 19세기는 판소리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남도의 민중속에서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던 판소리는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양반들에게 침투되고, 마침내는 궁중에까지 들어가게 되면서 융성을 누리게 되었다. 철종․고종․대원군 같은 이들은 판소리를 좋아했던 왕 및 왕족들이었다. 판소리가 지배층에게까지 침투되면서 기록자를 만나게 된다. 비록 이름 정도에 그치는 것이기는 해도, 판소리사에 있어서 구체적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이로 인하여 판소리는 유사시대(有史時代)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기록자들의 기호가 전적으로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판소리가 유파로 나뉘어질 정도로까지성장하게 되는데, 이 때 박유전은 창조적인 소리꾼으로서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된다. 흔히 박유전은 <서편제>소리의 시조로 알려져 있거니와, 이는 박유전의 판소리에 대한 공로와 영향력의 역사적 의의를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박유전은 순창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구체적인 사항은 알 수 없다. 누구에게, 어디서 판소리를 배웠는지도 알 수 없다. 박유전이 판소리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그의 초기 행적과 인적사항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은 이상할 정도이다. 순창은 박유전 외에도 김세종과 같은 대명창을 배출했던 곳이고, 일제시대에도 어전 명창 장판개가 살았었고, 이화중선을 가르쳤더는 무당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국악원이나 국악협회 하나 없는 곳이지만, 순창은 예전에는 판소리사에 중요한 공헌을 한 명창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이러한 곳이니 박유전 또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배출된 창조적인 소리꾼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있다. 박유전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은 박유전의 이러한 면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유전에 의해서 창시되었다는 서편제소리는 송흥록에 의해 창시되었다는 동편제 소리에 비하여, 여성적․기교적이며, 섬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서편제 소리는 내용이나 음악에 있어서 다른 소리에 비해 보다 무속적(巫俗的)성격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보다 남도적․민중적 성격의 소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서편제 소리의 성격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흔히 판소리는 동편제로부터 서편제가 파생되었다고 한다. 이는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송흥록이 서편제 소리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박유전보다는 한 세대 정도 선배라는 사실로부터 유추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렇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어야만 타당할 수 있다. 곧 동편제라는 스타일의 소리가 형성되자 우리나라의 모든 판소리는 동편제 스타일의 소리 일색으로 통일되었으며, 다른 양식의 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송흥록에 의해 독특한 동편제 소리가 생겼을 때에는 다른 스타일의 소리도 이미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동편제 소리가 널리 알려진 뒤에도 그 다양했던 소리들은 나름대로 전승이 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송흥록과 동시대 사람인 김성옥․모흥갑 등의 소리는 그 후에도 계속 전승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편제 소리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전라도 남부 지역(현재 서편제 소리의 전승지역)에는 동편제와 다른 독자적인 소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소리는 동편제 소리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이어내려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서편제 소리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남도 지역에 판소리가 엇ㅂ었다거나, 아니면 있었다고 하더라도, 동편제 소리로 통일되었다가, 다시 서편제 소리가 생긴 이후에 서편제 소리가 전승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러할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서울 양반 중심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이 지역에도 예부터 판소리가 있었으며, 그것이 계속 이어져 오다가 박유전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고, 그에 따라 중앙에까지도 진출하게 되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면서 널리 퍼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유전의 소리, 곳 서편제 소리의 모태가 되었던 소리는, 동편제 소리가 대두되기 훨씬 전부터 전라도 남부 지역에 존재하던 원판소리라 할 것이다. 따라서 서편소리의 모태가 된 소리는 보다 더 무가(巫歌)와 가까웠을것임에 틀림없다. 서편소리가 계면조(슬픈가락)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거나, 발림(육체적 표현)이 세련되어 있다거나, 무속적 성격이 강하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요컨대 서편 소리는 일찍이 양반 귀족들의 미의식과 기호에 영합해 간 동편소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민중지향적 성격의 소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서편소리가 뒤늦게 서울의 양반청중들에게 침투할 수 있었던 것도, 동편소리를 통하여 어느정도 남도적 감성에 맛을 들인 이후에야 비로소 서편소리의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박유전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박유전은 대원군의 사랑에 출입하며 대원군의 애호를 받으면서 명성을 날린 사람이다. 대원군은 판소리를 매우 좋아해서 그의 사랑에는 수많은 소리꾼이 드나들었는데, 박유전은 항상 <새타령>으로 좌중의 찬탄을 이끌어 냈다고 한다. 이 새타령은 민요 새타령으로 이날치를 거쳐 이동백에게 전해졌으며, 이동백은 일제 시대 새타령을 잘 불러서 레코드 취입까지 한 바 있다. 새타령은 지금도 남도 민요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의 하나이다. 박유전은 <적벽가> <심청가>를 특히 잘불렀으며, <춘향기>중 ‘이별가’에도 뒤어나서 그의 더늠이 현대 찬소리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박유전의 소리에 탄복한 대원군은 박유전에게 무과(武科)선달(先達)의 직첩을 내렸으며, 오수경(烏首鏡, 썬그라스)과 황금토시까지 하사했다고 한다. 박유전의 호는 강산(강산(江山))이라 하는데, 이도 또한 박유전의 소리를 들은 대원군이 ‘네가 제일강산이다’ 곧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판소리를 좋아했던 대원군은 1873년 권좌에서 실각했고, 권좌에의 복귀를 노리던 그는 1882년 임오군란을 통해 지잽권에 성공했으나, 곧 청나라에 의해 중국으로 납치됨으로써 정치적 생명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대원군의 애호를 받았던 박유전 또한 다른소리꾼들과 함께 낙향을 하게 된다. 이때 나주부근에 살던 정재근이 박유전을 스승으로 삼아 모시고 보성까지 내려감으로써, 박유전은 말년을 보성에서 보내게 되었다. 박유전이 말년을 보낸 보성읍 강산리 대야리에는 강산제(박유전의 말년의 소리, 그러니까 정재근에게 이어진 소리를 그의 호를 따라 그렇게 부른다) 판소리 예적비(藝蹟碑)가 서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수가 없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한 경루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중에 눈길에서 얼어죽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소리꾼들이 하대를 받던 시절이라고 해도, 당대 최고의 음악가의 최후로는 너무나 비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박유전이 살았던 동네 한편 야산 발치에는 박유전이 앉아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커다란 바위들이 있고, 그 바위들 곁에는 마을 사람들이 ‘벼슬무덤’이라 부르는 무덤이 있다. 무덤이래야 무덤이라고 하니 그런가 싶지, 봉분도, 상석도 없이 그저 약간 도도록한 정도에 지나지 않앗다. 그 마을 사람들은 이 벼슬 무덤이 박유전의 무덤이라고 했다. 벼슬을 갖고 있으면서도 상석이나 비석 하나 없고, 돌보는 이 하나 없는 무덤, 그것은 무과 선달의 직첩을 받았지만 역시 천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뒤어넘을 수 없었던 광대의 무덤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유전은 박창섭․정창업․이날치․정재근 등의 제자를 두었으며, 이들의 소리는 주로 전라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퍼져 한국의 대표적인 소리로 성장하였다. 특히 현대에 올수록 서편소리 취향은 더욱 증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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