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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 | 연재 [문화저널]
며늘애기의 도룡탕
박남준․편집위원(2004-01-29 13:36:48)

서러움, 서러움해도 그중 가장 큰 설움이 집없는 설움이요, 고달픈 것은 시집살이. 참기 어려운 것이 배고픈 것이라던 말들이 있습지요. 이번 이야기 보따리에는 그중 배고픔으로 굶주렸던 시절 전해오던 이야기를 부족한 말재간이옵지만 풀어보겠습니다요. 예? 뭐시라고요? 긍게 시방 저한테 한마디로 거뭐시냐 이를테면 딱 부러지게 말혀서 시비를 거시는 것이 아닝가 허요만, 아니라고라우? 아 재조가 없으면 안하면 될 것이지 궁색한 변명은 이야기 초두에서부터 꺼낼 것이 뭐냐는 말씸이 바로 시비가 아니고 뭔비요? 퇴비요, 아니면 몽달 도깨비요? 어어 이 양반이 지금 쓸말이 부족하니깐 두루 그렇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글자칸 수를 불리고 기시는 구만. 아이구미! (찔끔) 험험 거두절미하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것습니다요. 깊은 산중 집 몇채 되지 않는 그만그만한 애옥살림들을 겨우겨우 목숨이라고 부지하며 살아가는 마을이 있었다. 가파른 산비탈을 화전하며 돈이 될만한 것이라고는 숯을 구워 내다 파는 일이 고작이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로 가진 자는 더더욱 눈을 부라리며 재물을 탐했소, 헐벗은 자는 가진자의 안락한 삶의 댓가로 쓰여지는 일이 그리 변하지 않았다. 고생고생하며 숯을 구워봐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중 마을 집으로 돌아오는 두 손엔 허기로운 바람이 쥐어져 있을 뿐이었다. 노안과 영양실조로 몇 년전부터 앞을 못보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지요. 명절이 되어서도 시아버지 제삿날이 돌아와도 고기국은 커녕 비린내 나는 생선대가리 하나 밥상머리에 오르내리지 못하는 구차한 살림이었습니다만 심성 무던한 며늘애기는 불평하는 일이 한번 없었습니다요. 우스갯소리로 그것이 어디 심성 좋기로만 가능 했겠습니까요. 근력좋은 남편의 천지공사의 조화재간도 작용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습지요.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연록의 빛고운 청보리가 이제 갓패어 세상에 고개를 내밀던 오월의 봄날이었습니다요. 이제는 옛말이 되어 나이 자신 분들의 험난한 인생살이의 추억거리로, 요즈음 젊은이들의 분수모르는 소비적인 생활을 꾸짖는데 바늘에 실 가듯 따라오는 바로 보리고개가 시작되는 때였습니다요. 태산준령이 제 아무리 좁다해도 내 뱃속이 차고 넘어야 할 보릿대고개만큼 험하고 힘겹겠느냐던 이야기도 나올 정도로 가난한 젊은부부의 살림으로는 그야말로 굶기를 밥먹듯 도대체가 늙으신 어머니 한분의 수발도 힘에부칠 지경이었습니다그려. 이집 저집 몇채되지 않는 마을에 아예 동네를 떠나는 집안들도 있었습니다. 대처로 어디든 나가 남의집 품이라도 팔고 하다 못해 흥부처럼 매품이라도 판다면 산입에 거미줄 치고 앉아 있는 이곳보다야 못살겠냐며 눈물바람 풀풀 날리며 떠나갔습니다그려. 그런 어느날이었습지요. 남편은 조용히 아내를 불러 오랜 침묵 끝에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한입이라도 줄이는 것이 났겠소” 그 말이 채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가며 남편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럼 앞도 못보시는 어머니를 고려장을 시키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렇게는 못하옵니다. 하늘이 저렇듯 퍼렇게 눈을 뜨고 내려보고 계시는데 아니되옵니다. 차라리 절더러 죽으라 하십시오” 아내는 남편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눈물바람의 도리질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의 말을 다 듣지않고 생각한 며늘애기의 오해였던 것입니다. 남편이 한입이라도 줄이자는 말은 곧 가장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느끼며 대처로 어디든 돈을 벌러 가겠으니 어려운 살림이지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참고 견디며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이집 저집 좋다해도 게집이 제일이요, 이방 저방 널다해도 서방품안만큼 더 너르랴. 아내는 그 너른 서방의 품에 안겨 이별을 고했다. “염려 마오소서. 한분 어머니, 제 몸을 살라서라도 힘을 다해 구완을 하겠사오니 부디 집안 걱정일랑은 놓으시고 타향객지 낭군님의 건강과 조속한 귀가를 바라옵니다. 제몸 아직 젊어 튼튼하온데 설마하니 살길이 없겠사오리까? 마음처럼 돈이 되지 않으시더라도 몸 상하지 말고 돌아오소서” 낭군은 떠나갔다. 쑥버무림, 송기껍질의 초근목피의 연명도 하루 이틀 사흘이지 늙으신 어머니의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갔다. 막막했다. 하늘은 어찌 저리도 무심하실까? 오월, 보릿고개의 따가운 볕에 나가 한 나절을 뜯어온 초근목피를 씻으며 쌀한톨은 커녕 보리쌀 아니 좁쌀한톨 흘러 나갈일 없는 수채구멍을 무심코 내려다 보았을 때였다. “아니, 저것이 뭐야?” 그것은 이 궁핍한 살림의 집안에서 무얼먹고 자랐는지 실하게 살이 통통히 오른 지렁이들이었다. 되가 되지 않을까? 남들이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낭군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어찌할까? 그러나 며늘애기는 굳게 결심을 하고 지렁이를 한 마리 두 마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아가, 에미야 이렇게 맛난 괴깃국을 이 어려운 때 어디서 구했느냐?” 며늘애기는 가슴이 뜨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바른대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 아랫동네 김부자집에 허드렛 일감을 앞으로 맡게 되었사옵니다 하여……” 앞 못보는 늙은 날 멕여 살리느라 에미 네 고생이 크다. 고맙구나. 너도 어여 좀 들려무나“ 며늘애기는 가슴이 아파 목이 메이고 흐르는 눈물을 숨 죽이며 옷고름에 훔쳤습니다. 어머니의 얼굴도 며늘애기의 얼굴도 이제는 검버섯이 피고 하얀 버집꽃이 피던 그런 상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유수와 같다는 그세월 동안 어머니는 착한 며늘애기가 시시 때때로 끓여 내오는 고깃국을 맛있게 들며 아들이 오면 이런 처음 먹어 보는 고기를 구경시키고 며늘애기 자랑도 해줄려고 한 마리 두 마리 말려 모아 마루장 밑에 감추었습니다. 넘기 힘든 보릿고개도 이제는 거의 넘어가던 어느 날 마당 앞 키큰 가죽나무위에 해가 나기가 무섭게 반가운 까치가 날아와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제나 오시려나 저제나 오시려나. 그러나 며늘애기는 한편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 날이었습니다. 칠년대한 가뭄 날에 오시는 빗발같이 반가운 사람, 벌써 한 석달이 다 되어도 소식없던 낭군님이 불쑥 집을 찾아 들었습니다. 남편의 행색은 초라한 몰골, 참으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돈 한푼 쥐어들지 못하고 염치없는 발길로 집에 돌아와 보니 아니 이게 무슨 조화입니까? 사내인 나 혼자의 몸도 끼니를 거르며 하루, 이틀 보내기를 무시로 해댔는데 앞 못보는 시어머니를 구완하며 어찌 이리도 잘 견디어 낸 정도가 아니라 아내도 어머니도 살이 통통히 오르고 살결은 우유빛처럼 뽀얗게 변한 행색이 이전의 그 궁기가 흐르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몰골이 내심 부끄럽고 또한 아내에 대하여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움을 느꼈다. “못난 사내를 두어 고생이 많았소. 한데 대체 어찌된 일이오? ”아내는 마치 죽을 죄를 지은양 고개를 푹떨군채 말이 없었고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범아 에미가 그간 날 날마다 맛있는 괴깃국을 멕이느라 힘든 김부자 집일을 도맡아 했단다. 봐라 너도 좀 보여줄라고 내가 이렇게 모아 두었단다.” “뭐라고 그것이 지렁이라고”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며늘애기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부엌으로 뛰쳐나가 서럽게 울었습니다. “얘야 이게 왠 조화 속이냐? 내가 눈이 다시 뜨이다니” 남편은 이 일이 일견 괘씸하기도 하고 일견 경악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자신의 가장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때문으로 비롯 되어진 일이었기에 아내를 탓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근력이 좋아지셨고 더군다나 십여년 전부터 앞을 못보시던 어머니께서 다시 눈을 훤히 뜨기까지 했지 않았는가? 그래, 하늘이 그 어려운 때 아내의 지극한 효성을 어여삐 여겨 먹을 것을 내리고 이제 다시 어머니의 눈까지 뜨게 하신 게야. 남편은 마음을 고쳐먹고 아내 곁으로 달려가 힘껏 안아주었습니다. “여보, 내 얼굴을 좀 보오, 몰골이 말이 아니지 않소? 오늘 저녁부터 내게도 그 맛있는 토룡탕을 좀 해주시오” 그날밤부터 천하에 둘도 없이 금슬 좋은 부부의 방안에서는 구들장이 흔들거리는 소리와 절구방아 찧는 소리가 온동네를 떠들썩 하게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요. 그리고 건넌 방의 어머니는 “얘야 절구 망가진다. 방아 살살 찧거라. 무슨 떡방아 집 채렸냐? 아들 방아나 찧거라. 손주 보고잡다”하고 웃으셨다는 이야기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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