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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연재 [문화저널]
가을날의 서정
박남준(2004-01-29 16:00:06)


1.
부는 바람이 상쾌하여라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은 저마다 익어 가는 그윽한 향내로 가득하다. 일렁이는 황금의 들녘에는 허수아비의 정겨움이 서려있다.
새떼를 쫓으려 세워둔 허수아비, 그도 이따금 지친 세들의 쉴곳이 되어주기도 하는걸 보면 문득 새삼스레 아름다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즐겁기가 이를 데 없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본다 논바닥이며 그 어느 한 모퉁이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허수아비의 비애를 본다.
삶이 다한 날의 외로움이여. 그 덧없음이여 아! 나의 삶도 저러하리라.

2.
꽃이 있었네. 하얀 꽃. 하얗게 새어서, 새어서 죽어 피어나는 꽃.
바람 부는 들녘의 언덕에는 하얀 소복으로 바람 날리며 너울거리는 억새들의 잔잔한 한숨이 묻혀있다.
이 땅을 일구며 지켜온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정결하고도 기막힌 삶들의 숨결 같은 억새밭의 곁에서면 어데선가 나타나는 새하얀 꽃상여의 행열.
흔들리며 흔들리며 물결쳐 오는 그 애잔하던 울음.

3.
노을이 지고 이윽고 밤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언제인가 벌써 길섶의 풀잎들에 내려앉은 이슬, 이슬방울들. 갈잎으로 져야만 하는, 그러므로 안타까운, 지는 잎새들의 맑은 눈물인가.?
나는 무심결로도 저 맑은 잎새들의 눈물 밟으며 지날 수 없었다.
남몰래 소리 죽여 밤새 피워낸 꽃 같은 눈물 차마도 부끄러워 햇살에 반짝이며 눈물자위 지우는 잎새들.
그래 너희들의 그 꽃 같은 눈물 아침마다 눈부신 햇살로 거둬 가서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밭을 만들었을 게다.
푸르도록 맑은 별들의 정화여!
나도 언제인가 꽃처럼 울어 보았으면

4.
산중의 밤은 자못 한기를 느끼게 한다. 따듯한 방구들이 간절히도 그리워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우우― 소리친다. 신음처럼 부들부들 몸부림치며 한줌 재로, 연기로 화해가는 작은 나뭇가지들, 솔잎들. 참으로 나는 내 한몸 편하고자 많은 것들의 숨을 사르는구나
따듯한 방. 몸을 살라 불을 지핀 나무들, 솔잎들의 불성.
그 고마움.
왜 나는 새벽녘 문수암에서 들려오는 범종소리 못 듣는 것이냐. 문수암 에서는 혹시 새벽예불을 드리지 않는 것이냐

5.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ꡓ
김용택의 시 “초가”가 떠올랐다. 산중 적막고요를 깨고 귀뚜르르 귀뚜르 들려오는 가을 밤. 허, 이것 봐라 공복의 허기를 뚫고 꿈틀거리는 술벌레들. 벗삼아 소줏잔기울일 그리운 얼굴들은 오늘따라 이다지도 간절할까?

6.
하늘 하늘 갓 피어난 쑥부쟁이 꽃. 바람을 타고 춤추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도 어여쁘다. 어디 이쁘지 않는 꽃이 있으랴만 스무살, 서른살, 그리고도 이제 서른다섯날의 나이, 거울을 보면 어찌 이러할까 추한 몰골. 한 십년 아니면 이십년 다시 삼십년이 흐른후에 그때는 보일까 만날 수 있을까 거울속에 쑥부쟁이 꽃의 웃음

7.
한 밤, 천정을 타고 내려오는 거미, 종이에 받아서 문을 열고 차거운 방밖으로 쓸어 내었다. 문득 배석의 눈물처럼 여린 시 “수라”가 생각났다. 혹 이 버럿이 그의 시를 읽고 난 연후로 인해 생겨난 것일까 아니면 ……

8.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 개울가의 투명한 김발. 손을 담그면 간밤의 꼬리에 긴 꼬리를 몰고 뒤척이던 온갖 시름이며 상념들 깜짝 놀라서 모두들 단숨에 도망을 한다. 문득 손을 놓고 올려다 본 하늘. 세수라는 것, 내 마음의 얼굴을 명결 처럼 맑게 해야 하는 것임. 그것 일터인데

9.
길게 드리운 산 그림자. 산에 들어 산을 보지 못했는데 다만 먼 산을 보았을 뿐이었는데 산길을 가다가다 노오란 들국 만났네. 널 보고도 잠시 발길 멈추지 않는다면… 비로소 다가오는 산. 어디 누구 보이는 이 없어도 산중 저처럼 곱게 피어 올리는 들국의 큰 가르침, 내분명 산을 내려왔는데 아스팔트의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전해 오는 들국의 그윽한 향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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